셋. 불행 페르소나를 쓰게 된 나

by 다문 DaaMoon

장년에 접어든 사람에게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의 그래프를 그려보라고 한다면 높은 산 봉우리 하나 정도는 나올 것이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인생의 오르막을 처음 경험할 때, 그 꼭대기라는 것이 언제인 지 아는 사람은 존재할까? 아마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자신이 정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마치 주식 차트의 꼭대기를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하다. 지나가야만, 아니 떨어져야만 그곳이 꼭대기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우상향이었던 내 인생의 그래프가 정점에 가까워졌음을 몰랐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르는 사이 나는 내리막 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좋은 일들이 동시에 온 것처럼, 나쁜 일들도 동시에 온다. 결혼 생활 4년째에 들은 어느 날, 우리는 그리 큰일이 아닌 일로 다투게 되었다. 나는 문제를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거짓말과 문제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흐르기 전에 최대한 빨리 당사자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그 해결책의 첫 번째 단계이다. 나는 그렇게 문제를 드러내 놓고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이 나중에 부부관계의 금을 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냥 피하는 것이,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 것이 해결하게 되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런 성격은 한 가지 문제에서 그다음 문제, 또 그다음 문제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나는 천성적으로 싸우는 것을 싫어했다. 내가 잘못했던 남이 잘못했든 간에 말이다. 일반적으로 다툼이 생기면 적어도 대항을 하든 변명을 하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지만, 그런 것조차 하지 않고, 다툼을 끝내기 위한 저항으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게 하고는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바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방향, 즉 전부 내 탓이라는 것으로 상대방은 내 침묵을 이해했다. 나는 평소에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결정적일 때는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말하는 것조차 잘하지 못했다. 주위 사람이 편하고 기분이 좋아할 수 있도록 다 맞추는 노력을 하는 성격.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계속하다 보니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영역은 점점 없어져 버렸고, 그 끝에서는 항상 인간관계를 한 순간에 다 끊어버리는 나였다. 그러니 상대방은 무엇이 어떻게 되어 이렇게 되었는지 중간 과정을 전혀 인식 못 하는 가운데, 결론만 통보받게 될 뿐이었다.


결국 성격차이라는 편리한 네 글자를 이유로 부부 사이가 남남으로 정리되어 버렸다. 반목한 반년 동안, 나는 참 미숙했다. 사람들에게는 성격차이라고 누구의 잘못도 아닌 듯한 이유를 붙여 설명을 했지만, 정작 자신은 왜 이런 결말을 맞이하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갈라서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혼이 특별히 한 사람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닐 때에는 서로에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혼한 지 4년이나 지난 후에야 무엇이 문제였고 왜 그랬는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렇게 개인사가 피폐의 일로에 들어섰을 때 직장에서도 정점에서 내려오는 신호가 감지되었다. 일은 1년째는 새롭고 어렵다. 2년째는 익숙해진다. 3년째는 지겨워진다. 하지만, 5년째가 되면 새로운 것을 하기 싫어진다. 국제부에서 유학생을 담당하며 들어선 5년째, 새로운 것보다 지겨운 것이 더 나았다. 그런 나에게 업무 변경 지시가 내려왔다. 앞으로 맡을 새 담당업무는 지금까지 4년 간 해 오면서 익혀 온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이제까지 대학교로 유입되는 유학생을 담당했다면 이제부터는 해외로 떠나는 대학생이 그 대상이 되었다. 둘 다 크게 보면 유학이라는 개념 속에 존재하는 업무여서 비슷하게 보이겠지만, 실제로 손을 대어 보면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까지는 유학생을 매일 보면서 유학생 선배로서 내가 먼저 걸어온 길을 걸어가는 후배를 서포트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먼저 걸어본 길을 듣는 유학생들의 반짝이는 눈을 볼 때면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유학을 보내는 쪽은 대부분이 국내 학생에 까다로운 학부모까지 상대하는 것으로 일이 바뀌었다. 더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애매한 정부 지침과 그것을 해독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학담당이 되고부터는 외국인인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게 되었고 어느새인가부터 출근하면서 향하는 내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특별히 내가 상사와 문제가 있어서 이런 어려운 담당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상사라는 인종과는 친해본 적이 없지만, 안 친하다고 불이익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안과 밖에서 문제가 동시에 불거지고 있었다.


빛나 보이던 풍경은 하나씩 그 색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 해 여름 나는 혼자서 남겨졌다. 이혼 절차가 끝나고 이제는 혼자서 살기 시작했지만 불편한 회사에는 여전히 다니고 있었다. 평일에는 직장에 나가면 사람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집에 돌아오면 혼자라는 사실이 꼭 겨울 찬 바람에 벌거벗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역시 난 자리가 든 자리보다 큰 것은 사실이었다. TV 소리는 사람 목소리를 대신했지만, 사람의 온기를 대신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의 온기를 보충하려 아무 술자리나 참석했다. 어떻게 현상 유지는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 불편한 마음을 크게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 없을까 매일 찾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널 위해 준비했어’라고 말하듯 찾아온 기회가 있었다.


내가 해외 유학 담당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교내에서 유학생이라면 꼭 쳐야 하는 영어 시험을 계획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담당자인 직장 선배에게 물어봤다.


“선배님, 영어 시험을 교내에서 특별히 친다고 저번에 그랬죠?”

“응, 다다음주 토요일에 교내에서 칠 거야.”

“영어 시험 이름이 뭐죠? 저도 왠지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시험은 아이엘츠(IELTS)라고 유학을 가려는 학생들은 대부분 이 시험을 친다고 보면 되는데... 왜? 시험에 관심 있어?”

“네, 저도 이제 해외 유학 담당인데 저는 토플 말고는 시험을 쳐 보지도 않았고, 아이엘츠는 처음 들어보니 관심이 가네요.”

“그럼, 너도 쳐 봐. 특별히 교직원은 할인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힘 좀 써 볼게!”


흐름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 대화를 하다 보니 결국 시험을 치게 되었다. 오랜만에 해 보는 공부라 자극도 되었고 도서관에서 관련 책도 빌려서 봤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는 못 했지만, 시험 유형이나 모의 테스트를 두 번 정도 쳐서 어느 정도 시험 칠 기본자세는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시험 결과는 전체 9점 만점 중 6.5점. 약 70% 정도? 의 결과가 나왔다. 처음 친 것치곤 나쁘지 않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점수는 대학원에 갈 수 있는 턱걸이 성적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그렇게 우연히 영어 점수가 준비되어 있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것을 움직일 신호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영어권으로 유학을 가리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영어 점수를 마련한 것은 마치 신이 안내하는 더 나은 길이라 생각해 버렸다. 게다가 얼마 전에 내가 일하던 대학과 호주 국립대학이 교환학생 협정을 맺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호주 국립대학의 홈페이지를 봤을 때, 나도 유학을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고 운명만 존재한다고 믿고 있던 나는 이런 것조차도 다 흐름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본격적으로 호주로의 유학을 결정했다. 이제 남은 건 공부할 내용을 정하는 것과 그 전공으로 갈 수 있는 유학 자금이 있느냐였다. 문과계열은 처음이었지만 국제부에서 일하면서 더 알고 싶었던 국제관계학을 이번 기회에 배우기로 정했다. 이혼 후 남은 저축과 퇴직을 하면 나오는 퇴직금을 합하면 얼추 2년간의 학비와 생활비를 댈 수 있는 금액은 되어 보였다. 이쯤 되니 정말로 이건 하늘이 마련해 준 길이라고 스스로 납득이 되었다. ‘그래, 지금 가야 되는 거야! 이렇게 의도치 않게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안 가면 더 크게 될 가능성을 놓치는 것이 될 거야!’ 그리고 내 나이 36. 이번에 도전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내 인생에 도전은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마치 안전한 것은 알지만 우울한 기찻길 위에서 레일 변경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없는 그런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퇴직할 마음을 먹었다. 몇몇 친한 동료나 선배에게 내 의향을 먼저 전달을 했는데, 8대 2 정도로 대부분이 내가 하려는 유학을 반대했다. 특히 선배들은 하나같이 퇴직하는 것을 말렸고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나는 여러분이 선배의 말은 잘 듣기를 추천한다. 특히 고생을 한 선배들에 한해서는 더더욱이다. 그들은 안다. 이미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뉴 첼린저가 보고 있는 목표가 얼마나 환상적인 것인지, 생각이 이루어지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말이다. 그렇지만, 말리면 더 하고 싶은 법, 그리고 적어도 5분의 1은 내 결정을 밀어주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딱 내가 그랬다. 선배들은 말한다. “불이 뜨거운 것을 꼭 데어봐야 알겠냐고.” 나는 대답했다. “불에 데이는 것도 좋은 경험 아닌가요?”라고. 그나마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냐고라고 묻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외국인이라면 아마도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도 모를 것이다. 그전에 둘 다 안 먹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11년간 이국 땅에서 쌓아온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결정을 했다.


나는 보기 싫은 현실을 눈앞에 두고 기회인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길을 선택했다. 잘 생각해보면 가시방석을 피해 가시가 없어 보이는 다른 방석 위로 앉았던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했어야 했다. 다른 방석이 가시 방석은 아닌 것 같아도 실은 방석조차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피하고 싶을 때 나타나는 기회라는 딱지가 붙은 길은 빛 좋은 개살구처럼 속을 파보면 함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여우를 피하면 호랑이를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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