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라는 생각만 해도 햇살이 보였다. 남반구의 대륙이라고 불리는 아주 큰 섬. 강렬한 햇살과 깨끗한 공기로 세상의 온갖 빛깔이 한없이 진하게 보이는 곳, 그런 기분이 들었다. 마치 ‘우중충한 북반구를 떠나 빛나는 남반구로!’라는 구호가 어딘가에 써져 있을 것만 같았다.
11년이라는 긴 세월과는 달리 일주일 만에 일본에서의 내 흔적은 쉽게 지울 수 있었다. 쓸만한 것은 지인들에게 다 그냥 나뉘어 주었다. 그냥 주고 싶었다. 혼수용품이 많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귀찮아서 그냥 주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가산을 처분하고 동시에 호주로 갈 각종 수속을 밟고 아직은 추운 겨울이 가시지 않은 2월에 호주로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열 시간이 넘게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창가에 앉은 나는 때때로 파란 바다 위에 떠 있는 구름을 보며 왠지 모를 설렘으로 긴 비행시간에도 불구하고 잠을 거의 못 이루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느끼고 있었던 막연한 불안감은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히고 있지 않았다.
남반구는 처음이라 비행기에서 입고 있던 겨울 옷을 입은 채로 나오니 10분도 안 되어서 얼굴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북반구와는 정반대의 계절이라 호주는 여름이었다. 계절이 반대라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항상 비현실적인 이야기만으로 느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호주에 왔음을 실감했다.
새로운 곳에 갈 때 꼭 덤으로 따라오는 설렘과 어디를 바라보던 눈에 들어오는 낯선 풍경들에 신선한 자극에 나는 상기되어 있었다. 게이트를 빠져나오니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내가 눈을 마주치기도 전에 이미 내가 자신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는지 내 뒤에 따라 들어오고 있는 사람들로 시선이 옮겨가 있었다. 나는 호주에 연고가 없으니, 아무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하다. 그런데 진을 치던 사람들이 하나 둘, 기다리던 사람과 만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지는 광경에 자꾸만 눈이 갔다.
캔버라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안내소를 찾았을 때였다. 곱게 늙은 할머니가 안내소를 지키고 있었고 나는 아마도 버스정류장을 찾는다고 제대로 말했던 것 같은데 돌아온 대답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치 영어가 아닌 듯 알 수 없는 소리만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순간, ‘어라? 영어에는 영국식과 미국식이라는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하고 당황했다. 호주식 영어는 내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알았다. 시작부터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캔버라에 도착해 유스호스텔에서 일주일간 머물며 집을 구한 나는, 이제 와서 걱정이 가득 해 졌다. 일본에 갔을 때 비교적 짧은 시간에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던 일본어처럼, 영어도 그런 식으로 늘지 않을까 하고 낙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과거의 성공담이 앞으로도 이어지리라 믿는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이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항에서 이미 내 실력이 드러났듯이 이 상태로 대학원이 시작되면 학점은 고사하고 수업 중에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을지 막막했다. 그리고 살짝 ‘좀 더 알아봤어야 했나?’하는 후회가 일었다. 그래도 어쩌랴? 이미 칼은 뽑혔다. 그리고 학기가 시작되었다.
어느 수업이든 첫 시간에는 수업의 내용과 과제가 어떻게 되며, 학점은 어떤 방식으로 채점이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움직이는 교수님의 입을 보며 들리지 않는 그들의 말을 최대한 알아들으려 귀를 쫑긋 세우며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잡으려는 단어는 ‘과제.’ 그 단어 뒤에 이어지는 설명을 최대한 알아들어야 학점을 받을지 못 받을지를 알 수 있었다. 즉 ‘과제’는 대학원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단어였다. 실제로는 과제라는 단어를 들어도 그 내용을 다 듣지 못할 때도 종종 있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옆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못 알아들었는데, 교수님이 뭐라고 했어요?”라고 물으며 정보를 수집했다. 학비는 이미 지불했으니, 내가 할 일은 부끄러워도 본전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한 학교는 나에게는 신선한 지옥이었다. 필수로 읽어가야 할 자료는 많았고 나는 독서가 아닌 독해를 했다. 거기다가 내가 선택한 대학원은 국제관계학으로 나는 관련 학부 수업을 듣지 않은 채 석사 과정을 시작한 덕분에, 기초 이론이나 지식은 따로 혼자서 공부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부족해 수업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은 도서관 귀퉁이의 딱딱한 의자 위였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나 많이 본 서양의 캠퍼스 라이프는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이나 도서관으로 갈 때나 잠깐씩 남의 모습에서 살짝 엿볼 수 있는 것이었고, 나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드라마 속 이야기였다. 그 대신 도서관의 부유하는 언제부터 번식했을지 모를 캠퍼스의 곰팡이는 많이 흡입할 수 있었다.
학기 중에는 과제 삼매경에 체력이 바닥이 났고, 방학 후에는 무사히 학기를 넘긴 것을 자축하며, 방전된 정신을 위한 양식을 유튜브에서 섭취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영어권 유학의 목적 중 하나인 영어는 내가 즐기면서 배울 만한 과목이 아님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주위가 모두 영어라는 환경은 영어 습득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나에게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는지, 2년째에 들어서서는 수업 중에 어떤 얘기를 하는 중인지 정도는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미묘한 뉘앙스 차이에서 오는 농담이야 졸업할 때까지 웃을 타이밍을 놓쳐서 항상 어설픈 표정이 되었지만, 과락 없이 정규시간 내에 석사 과정을 무사히 끝내 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다.
대학원에 와서 좋았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그 한 가지는 내가 원한 것이 성취되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후에 내가 많이 의지하게 되는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친구의 이름은 이영석. 동갑내기. 나처럼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기회를 찾으러 온 것이다. 나와 다른 점은 가족과 함께 왔다는 것과 한국에서만 계속 살아왔던 점 정도였다. 하지만 그와 만난 일은 마치 신이 처음부터 내 앞길을 훤히 보고, 나를 돌봐주기 위해서였을 지도 모른다고 후에 생각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늦깎이 대학원 생활은 조용히 그렇지만 만족스럽게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직장인에서 학생으로 돌아간 뒤, 졸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면 다시 직장인이 되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호주라면 이민 국가라서 더욱 기회가 많을 것이라고 막연히 보고 있던 희망에 가득 찬 미래상은 마지막 학기에 들어서서 드디어 현실의 색깔이 입혀지게 되었다. 때는 호주의 경제가 하향하기 시작했고, 전 세계에서 붐처럼 일었던 극 보수성향은 호주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었다. 대부분의 직장은 처음부터 영주권 이상의 자격이 있는 사람만 대상으로 구인을 하였다. 즉, 나는 유학을 통해서 2년 간의 단기 취업 비자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 비자가 취직에의 티켓은 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정규직은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당장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가 유학에서 얻은 건, 몇 만불이나 지불하고 난 뒤 받은 졸업장 한 장, 그리고 없던 미간 사이의 주름이 다였다. 다른 어떤 프리미엄도 없는 종이 한 장은 내 미래는 관심 없는 듯, 내 앞길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에 비해 미간 사이의 주름은 현지 사람들에게 내가 곤란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을 하지 않고도 전달만 할 뿐이었다. 가족과 지인들의 반대에도 큰 소리를 치고 온 유학은 반대로 ‘내가 무슨 선택을 해 버린 거지?’라는 질문만 내게 남겨놓았다.
한 가지 내가 확실히 깨달았던 것은 지금이 싫어서 선택하는 대안이란 싫어하던 요소가 그대로 녹아들어 있는 대안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치하면 더 커지는 문제처럼, 무언가를 피해서 선택한 대안에는 더 큰 무언가가 딸려오기 마련이었다. 그 결과가 유학이 끝날 무렵에 내 눈앞의 현실에 반영이 되어 나를 막다른 길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랬다. 나는 성급하게 판단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