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못난이의 박하사탕

by 다문 DaaMoon

나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노을은 잘 익었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옆에는 영석이가 앉아 있었다.


“아르바이트는 어때?”

“뭐, 할 만한데, 일하는 시간이 짧아서 돈이 안 모이네.”

“너도 좋은 자리 잡아야 할 텐데…”

“글쎄, 전혀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게 말하며 나는 자조하듯 살짝 웃었다.


“내일 스톰이 온다던데?”

“그래? 올 거면 이 세상을 다 쓸어버릴 때까지 비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네. 미래 걱정 안 해도 되게, 하하”


농담처럼 말했지만, 나는 진심으로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할 수 없다면 하늘의 힘이라도 빌려서 끝장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끝내주길 바라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는 하루에 3~4시간밖에 일을 안 했고, 렌트비와 식비까지는 다 그 정도 벌이만으로도 충당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20대였더라면 당분간은 아무런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곧 40대를 목전에 둔 상태, 그리고 호주에서의 재취업은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일본으로 되돌아가 볼 생각도 했다. 실제로도 인터넷으로 몇 군데 지원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경력의 연속성이 없고 이직까지 한 경력자는 그냥 매력이 없는 외국인이었는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10개월을 별 다른 성과 없이 보내고 있었다. 나는 초조했고 초라해졌다. 그럴 때, 예전에 다녔던 대학교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못나게도 내가 그만둔 대학교에 다시 기어들어갈 생각으로 구인 모집에 서류를 냈다. 부끄러운 마음은 들었지만 내 나름대로는 승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이유로는 내가 회사를 다닐 때 특별히 크게 잘못한 점이 없다는 것과 친한 동료들이 꽤 있다는 사실에서 큰소리치고 떠난 직장의 문을 다시 두드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순조로워 보였다. 서류는 통과되어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급히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해서 일본까지 열 시간을 넘게 날아갔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도중에 들른 대만에서는 태풍의 영향권이라는 뉴스로 조마조마하게 TV를 보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비행기를 탈 무렵에는 태풍이 비껴나가 조금 연착한 수준으로 일본으로 향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사실도 ‘이게 다 내가 가야 할 길이라 생기는 기적’이라 믿으며, 이미 면접을 보러 갈 때 입을 옷이나 면접 때 할 말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내 운은 거기까지였다. 예전에 취업할 때는 첫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반대였고 그대로 최종 합격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면접 중에 ‘1차 면접 통과’라는 생각이 들만큼 면접 당시에 분위기는 아주 좋아서 나는 2차 면접도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정반대의 결과가 3일 뒤에 온 메일에 쓰여 있었다.


"지원자님,

바쁘신 가운데 저희 대학교 채용에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공정한 심사를 한 결과, 아쉽게도 귀하의 응모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해해주시길 바라며 다른 곳에서 활약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인사과 드림"


정말로 내가 다른 곳에서 진심으로 활약하기를 바라듯이 내 과거의 연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나는 더 긴 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최종면접 기간 동안 머물 호텔까지 예약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는 가장 싼 티켓이라 변경이 불가능했다. 나는 의도치 않게 내 실패를 곱씹을 2주간의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생겼다. 불안정한 현재,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나. 나는 왜 이런 선택을 해 버린 것일까? 나는 나를 너무 낙관했던 것이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눈웃음과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본다.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는지 신기하게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렇게 즐거울까? 불합격 통보를 받은 다음 날 아침, 거리에 전화를 하며 걸어가는 한 여자를 봤다. 그러면서 살짝 나도 웃어보았다. 입꼬리만 올라가고 눈 주위는 경직된 어색한 웃음. 웃는 법이 생각이 안 났다.


면접을 가는 김에 동료들도 보기로 사전에 약속을 했다. 이것이야말로 ‘김칫국부터 마신다’의 현실판이었다. 일단 약속은 했으니 만나긴 만나야 했다. 먼저 가 기다리는 선술집에서 어떻게 얘기를 해야 내가 덜 비참해 보일까 골똘히 생각했다.


이윽고, 다들 일을 마치고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모였다.


“오랜만이네. 바빠 보인다.”

“정말, 너무 바빠. 네가 떠난 지 2년이 넘었는데 요 며칠 전 일 같다. “

“나도 그래, 갈수록 일이 많아지네. 매일 잔업이고 지겹다.”

“호주는 어때?”

“날씨는 좋고, 시간은 천천히 흘러. 공기도 좋고 해서 그것만은 정말 좋은 것 같다.”


호주의 장점은 더 있을 법했지만, 나에게는 깨끗한 자연이 주는 것 이외에는 딱히 떠 오르는 것이 없었다.


“나도 호주에 가보고 싶네. 거기는 복지도 좋다며? 사람은 그런 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말이지.”


동기 하나가 그렇게 말을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대로만 이루어졌으면 더 눈을 빛내며 짧은 근무시간, 높은 급료, 긴 휴가 등등 호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혜택을 뽐내며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너희들이 부럽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그대로 지금도 가지고 있는 너희들이 나보다 더 낫다. 내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그러게, 주위에 얘기를 들어보니 정말 그렇더라. 대학생은 용돈도 정부가 주고 말이지.”라고 말하며 말을 맞췄다.


바로 면접 결과를 물어보기는 부담을 주는 것 같았는지, 서로의 안부와 주변 상황만 물어보았다. 술이 몇 번 돌고 난 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동기 하나가 물었다.


“그래서 면접은 어땠는데?”

“필기나 면접은 그런대로 봤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부족했던 모양이야. 아마도 나이가 아닐까?”


라며 나는 불합격한 면접의 분위기를 띄웠다. 그래도 나는 내가 생각한 최대한으로 내가 다치지 않는 표현으로 ‘나이 탓’을 들었다. 누가 알겠는가, 나이인지 국적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가 대답한 답이 모범 답안에서 제일 먼 거리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 번 나간 직장을 다시 들어오려고 한다는 것은 또 쉽게 그만둘 것이라는 것을 암시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마음대로 나갔던 사람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럼, 결과가 나왔어?”

“응, 불합격이었어.”

나는 최대한 담담한 척 대답했다.


순간, 동기 둘은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는지 정적이 흘렀다. 나는 정적이 싫어, 애써 괜찮은 듯 “괜찮아. 그래도 오랜만에 일본에 와서 좋아.”라고 그들의 기분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살폈다.


“우리 회사가 사람 보는 눈이 없네. 나는 서류가 통과되었다고 들었을 때, 재취업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라고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내가 못나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 같았다. 동료니 사실 서로 잘 안다. 그래서 그렇게 믿어준 동기들이 고마웠다. 그래도 그들은 인사과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 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고 현실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 나는 어떻게 비쳤을까? 실패한 도전자? 아니면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빛나 보였을까? 아니면 시간이 많아 보여 단순히 부러워 보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앞으로는 쉽게 연락하지 못하겠구나.라고 사회적인 지위랄까를 나와 그들로 구분해 버렸다. 역시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지 못하면 연락이 어렵겠지? 내가 떠난 곳은 따뜻한 난로가 있는 벽돌집이었음이 분명해졌다. 나는 지푸 집으로 스스로 나와서 난로에 기댈 수 없이 자신의 체온을 어떻게든 보존해야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가 버린 것이었다. 역시 돌아가고 싶었다.


예전에 본 박하사탕이란 영화가 생각났다. 영화를 본 이라면 아니 예고편만 본 이들도 기억하는 명장면.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주인공이 외치던 한 마디 ‘나 돌아갈래.’ 영화를 볼 때는 자신이 다 잘못했는데 누굴 탓하는 건지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겪어야만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누구의 말이 생각났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나도 못난이의 박하사탕이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이혼하기 전으로, 대학교를 그만두기 전으로. 조금만 참았더라면 지금보다 형편이 좋았을 텐데, 나는 왜 못 참고 내가 사랑했던 이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좋아해 주던 동료들을 떠났을까? 한스러웠다.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라는 말처럼 나도 이대로 가면 만족한 돼지가 될 것 같아서 불만족한 선현을 따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불만족이 아니라 불행한 돼지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돼지. 만족히 먹인 돼지야말로 가치가 있다. 물론 축산농가에게 말이다. 나는 소크라테스는 발밑에도 미치지 못했고 돼지보다도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믿어버렸다. 예전에 무턱대고 도전이라는 것은 해야 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이제 역으로 기피해야 하는 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리스크를 동반하는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도전=위험'이라는 공식이 되었다.


귀국 후 내 새로운 믿음이 증명이라도 되듯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내가 선택받은 그 도전은, 살아있는 것, 생명이라는 기본 조건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겪어보라는 듯 일어났다. 왜 내가 원하는 믿음은 이루어지지 않고, 한 번씩 화가 나서 한 실제로는 원하지 않는 믿음은 이렇게 잘 이루어지는지, 마치 이 세상의 방정식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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