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없어서 꼭 체험을 해야만 아는 미련한 성격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번 경험으로 깨달았다. 돌아갈 수 없다면 다시 하던 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앞으로 나아갔는지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았던 것인지 졸업하고 1년이 지나도 아무런 결과가 없었다. 그래서 제3의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 생활 자체를 보면 전혀 나쁘지 않았다. 하루에 일하는 시간이 3~4시간, 마치 어느 CEO의 ‘나는 하루 4시간만 일한다’와 같은 조건으로 일하는 것이다. 비록 급료는 그 CEO가 받는 것에 발톱 때만큼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말이다. 단지, 나는 생활이 유지될 만큼만 받았을 뿐이다. 문제는 자국민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런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 접고 한국으로 가 버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어릴 때부터 많이 듣던 말이다. 나는 마치 그 말처럼 무라도 썰어보리라 칼을 내리쳤지만 무에 박힌 칼은 뽑히지 않았다. 꼴사납다는 말을 현실에 적용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누가 지었는지 꼴사납다는 네 글자에 그런 상황을 다 표현하다니 천재적인 단어이다. 나는 항상은 아니지만 특정 상황에서의 실행력은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 빨랐다. 그리고 장점인지 단점인지, 결정 사항이 크면 클수록 더 빨리 움직였던 것 같다. 노련미라는 것은 많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많은 경험만이 있었고, 노련미는 길러지지 않았다. 여기서도 사람이라는 게 쉽게 변하지 않는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엄마, 나 올해 말에 한국으로 들어가려고.”
“왜? 호주는 어렵겠냐?”
“응. 여기는 영주권이 없으니 더 이상 내가 해 볼 수 있는 것이 없네. 일본에 돌아가려고 해도 너무 멀어서 면접 보기도 어렵고, 가까운 곳에서 가서 알아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그래, 날짜 나오면 알려줘.”
엄마는 아들의 일이 잘 안 풀린다는 사실에는 안쓰러운 마음이 있는 듯했지만, 항상 짧게만 머물다 가는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십수 년 만에 돌아간다는 말은 기뻤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런저런 말 없이 그냥 내 결정을 그대로 받아주었다. 그렇게 돌아갈 결정을 하고 아르바이트도 정리하고 돌아가는 비행기표 예약만 남은 어느 날 나에게 기회가 왔다.
브리즈번에 살고 있던 한 지인, 지인이라고 말하기에는 한 번밖에 만나보지 못했기에 거리가 있었고, 나이도 나보다 많은 아저씨였다. 그는 자신이 있는 곳에 와서 한번 구직의 기회를 살펴보는 것은 어떤가 하고 제안이 들어왔다. 예전에 만났을 때 패배감에 젖은 내 고민을 살짝 비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가 보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방을 빌려서 살고 있는 사람이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여행을 가고 없으니 2주 정도는 와 있어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한국으로 가기 전에 브리즈번이라도 보고 갈까? 숙박이 해결되면 돈도 별로 안 들 것이고 2주 정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늦어져도 별 문제없겠지’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실은 누군가 멍석을 깔아줘야 겨우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하지만, 나는 이제껏 호주에서 지낸 3년 동안 무박으로 다녀온 시드니 말고는 아무 곳도 가보지 않았다. 그래서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승낙을 하고 브리즈번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여름날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었던 2018년 12월 19일 아침. 나는 브리즈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러 캔버라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짐은 간단한 백팩 하나가 다였다. 짐만큼이나 가볍게 여행 가는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한 시간 반이 지나자 캔버라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 하늘에서도 보였다. 역시나 여행은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하늘 위에서 힐끗 봐도 큰 도시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호주에 와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즐겁다’였다. 나는 ‘여기라면 운이 트일지도 몰라’하고 초콜릿을 먹었을 때처럼 마음은 달콤한 핑크색으로 물들었다.
공항은 ‘여긴 캔버라와 달리 도시예요!’라고 말하는 듯한 디자인으로 세련됨을 맘껏 뽐내고 있었고 사람들도 붐비고 바쁜 도시 풍경이 공항 입구에서 있었다. 그는 미리 알려 받은 대로 지인인 아저씨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도착해서 보니 동양인들이 많이 사는 써니 뱅크 Sunnybank라는 지역이었다. 나는 그 이름에서도 빛을 느꼈다.
“여행은 어땠어요?”
“금방이던 걸요. 한 시간 반 만에 왔네요.”
“일단 이 방을 쓰고, 좀 쉬어요.”
그렇게 내가 방에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을 때, 아저씨가 이어서 말했다.
“아 참! 오늘 저녁에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는데 가 볼래요? 제 지인들이 많이 오는데 혹시 좋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니 피곤하지 않으면 같이 가요.”
내가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는데 나도 아저씨의 기대에 대한 보답이라도 해야겠다 싶은 마음에 같이 가는 걸로 정했다.
처음 보는 도시, 나는 달리는 차 속에서 밖의 풍경을 내가 가지고 있던 재산 중 가장 고가였던 카메라로 찍어대었다. 아저씨는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눈에 보이는 곳이 어디인지 설명해 주었다. 사람 이름도 잘 못 외우는 나에게는 생소한 지역 이름 따위는 한순간에 잊어버릴 것이었지만, 최대한 잘 들으려 애썼다. 아저씨는 우리가 도회지(시티)로 간다고 했고, 차는 시티에서 가장 가까운 공원 밖에 대어 두고 걸어서 파티장으로 향했다.
호주에 오고부터 나에게 여행이란 사치였다. 그래서 그 흔한 캥거루나 코알라와 찍은 사진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잠잘 곳이 마련된 곳에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거기다 첫날부터 조촐하긴 했지만 크리스마스 파티라니 행운이 따라 주는 것만 같았다.
“오늘 파티에는 누가 오나요?”
"호주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민자들이에요. 그래서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을 들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브리즈번은 살기 좋은 곳이어서 다른 지역에서도 이사를 많이 오는 곳이고 인구도 많아서 일은 캔버라보다 많을 거예요.”
“일만 구해진다면 여기로 이사 오는 건 일도 아니죠.”
희망의 대화. 얼마만이었는지 모른다. 상긋한 저녁 공기를 맡으며 파티 장소로 가니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간단히 참석한 사람들이 자기소개를 하는 도중, 음식이 나왔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동양인이 나에게 물었다.
“여기에는 뭐 하러 왔어요? 여행인가요?”
“여행이긴 하지만 가능하다면 일자리도 알아보고 있어요.”
"경력은 있나요?”
“네, 호주에서는 아니지만 교육 분야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그래요? 여기는 유학원도 많이 있으니 그런 쪽은 어때요?”
“저야 자리만 있으면 좋죠.”
“마침 제 친구 중에 한 명이 유학원에서 일하고 있어요. 한 번 물어봐 줄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맥이 풀릴 정도로 쉽게 일이 풀려 나갈 것 같은 분위기. 그 사람은 당장 스마트폰을 들어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조금 후 답장이라도 받았는지, 당장 내일이라도 이력서를 들고 가보라면서 내게 한 유학원의 주소를 건넸다. 나는 생각지도 않게 큰 수확을 얻어 흥분해 있었다. 2시간 정도 흐른 뒤, 파티도 끝이 났다. 음식점을 빠져나가면서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그것 봐요. 내 말 듣길 잘했죠?”
“그러게요. 덕분에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번에 우연히 아저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떠날 뻔했네요.”
“내일도 시티로 나와야겠네요. 주소를 보니 시티에 있는 유학원이네요.”
언제나 희망은 있다는 말처럼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역시 기회는 인맥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한 날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름이라고 해도 저녁 8시가 넘어 이미 밖은 어두웠다. 우리는 공원 밖에 세워둔 차로 향했다.
“공원을 가로질러 가면 금방이니 들어가죠.”
“브리즈번은 밤에 공원에 들어가도 괜찮나요?”
“여기는 마라톤대회도 하는 곳이고 괜찮을 거예요.”
호주의 공원은 낮은 괜찮지만 밤이 되면, 일본이나 한국과 달리 위험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차를 세워둔 곳의 공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이나 브리즈번에서 생활한 지인이 여기는 괜찮다고 하니, 별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라톤대회 개최와 밤의 안전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개념치 않았다. 사람은 항상 조심해야 했다. 특히, 마음이 떠 있을 때는 더더욱이다.
공원에 들어서고 수 분이 지났을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람은 동물인지라 자기를 향한 살기라는 것을 간혹 느끼기도 한다. 나는 지인에게 바로 알렸다.
“빨리 걷죠.”
“왜요?”
“뒤에 누가 붙은 것 같아서요.”
“여기는 가로등도 있고 해서 별일 없을 거예요.”
아저씨는 휙 돌아보고 그렇게 답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염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어이! 가방 내놔!"
흥분한 외침. 사내들이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것도 네 명이나 되었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피부색으로 원주민일 것 같았다. 그리고 십 대나 나이가 많다고 해도 20대 초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은 사내들이 손에는 무기 같은 것을 하나씩 들고 살기 띈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아니, 싫어!”라고 소리쳐 버렸다. 그리고 겁을 먹지 않고 말대답한 내가 못마땅했는지 상대방의 거친 욕지거리가 들렸다. 나는 지인에게,
“얼른 벗어나죠. 위험할 것 같아요.”
지인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발을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삐이~~~”
머리를 크게 부딪혔을 때 들리는 라디오 전자파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내 손은 미쳐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기도 전에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아마도 단말마도 있었을 것이지만 정확히는 몰랐다. 안경은 없었고 앞이 안 보이게 된 나는 그 자리에 웅크려 버렸다. 그리고 뒤에서 누군가가 내 가방을 열어서 뒤지는 소리가 들렸고, 곧 가방이 가벼워지면서 뒤적거리는 손길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지인은 웅크려있던 나를 감쌌고, 사내들은 무슨 말인지 듣지는 못했지만, 위협을 하는 듯한 말을 뱉어내면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강도를 당했다. 밤의 공원이라는 최적의 범죄 장소에 들어간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 아무래도 왼쪽 눈을 다친 것 같았다. 우리는 일단 사내들과 멀리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으로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 공원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제야 손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구급차를 불렀지만 금방 오지 않았다. 나는 빨리 눈이 어떻게 되었는지 초조한 마음에 급한 대로 아저씨 차로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 도착 후 몇 시간이나 기다리고 난 뒤 나는 겨우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자 눈을 떠 보세요. 뭐가 보이나요?”
“무엇도 보이지 않아요. 왼쪽으로는...”
“어떻게 보이는 가요?”
“빛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이것이 보이는 것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하얗네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풍경에 놀라는 것도 잊었는지 나는 이상하게도 너무나 담담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확하게 알려면 전문의의 진단이 필요하지만 아마도 수정체를 다치신 것 같아요. 그리고 안압도 낮아졌고요... 안압은 눈이 관통되어 눈 속의 물이 빠져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밝은 빛을 쏘이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나는 고등학교 생물시간 이후에 들어보는 수정체니, 홍채니, 안구 등등의 단어에 설명을 쫓아가기에 바빴다.
“안구 뒤쪽이 파열되었을 가능성도 있어요. 일단 바로 수술받도록 제가 요청을 할게요.”
처음의 진단이 끝나고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나는 안과 전문의에게 인계가 되었다.
“일단 각종 검사를 할 거예요. 검사가 끝나면 지금 이곳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리고 차례가 오면 바로 수술을 받게 될 거예요.”
나는 휠체어에 앉혀 남이 이끄는 대로 여기저기에서 검사를 받았다. 간단한 시력검사부터 안압이나 눈의 반응을 알아보는 검사 등 처음 받아보는 검사도 있었다. 일련의 검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수술복을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수술 대기실 침대로 안내를 받았다.
겨우 조금이나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누구에게 알리기는 해야겠다 싶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연락처의 리스트를 보고 제일 위에 나오는 엄마, 아빠, 형을 보고 잠깐 멈칫했지만, 바로 스크롤 해 버리고 영석이를 선택했다. 건너편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 친구, 브리즈번은 어떤가?”
“응, 브리즈번에 잘 왔어.”
“목소리가 이상한데? 무슨 일 있어?”
“실은 강도를 만나서 눈을 다쳤어. 병원에서는 눈이 뚫렸다고 하고, 눈을 떠보니 아무것도 안 보이네. 대충 얘기 들은 걸로는 눈이 뚫려서 물이 나오고 있고, 수정체가 기능이 안 되어서 그렇다는데... 잘못하면 실명할지도 모른다고 들었어. 지금은 병원에서 수술 기다리고 있어.”
나는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듯 담담하게 친구에게 자신의 상태를 얘기했다. 나와는 달리 친구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정적이 흘렀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강도를 만났다고? 눈 말고 다른 곳은 다친 곳이 없고?”
“응 눈만 다쳤다. 카메라하고 가방에 있던 것 일부가 뺏긴 것 같은데 지금 잘 안 보여서 잘 모르겠네.”
“잠깐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는 사람에게 물어볼게.”
“응 고맙다. 아직 수술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알게 되면 알려주게.”
“그래. 다른 사람에게 알릴까? 아니, 누구에게 연락했는데?”
“아직, 네가 처음이야. 부모님께는 못 알리겠다. 알려봐야 저 멀리서 발만 동동 구를 텐데... 일단 일이 일단락되면 그때 가서 사죄를 드리더라도 말이야.”
“그래, 알겠다.”
전화를 끊고 나는 가족에게 연락할 수 없는 이유를 몇 가지 대어 보았다.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떠나 온 호주 유학이었다. 나에게는 자존심이 있었다. 내가 아는 모두에게 내세울만한 결과를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좋은 조건의 직장을 버리고, 일본에서 일구어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온 곳이었다. 모아 온 돈만 쓰고 미안한 얼굴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생각에 집착해 버텨온 3년이었다. 물론 성과를 못 내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긍정적인 생각에 마지막으로 희망에 걸어보겠다고 들른 브리즈번이었다.
낙차 효과
들어 올렸다가 놓아야 그 효과가 큰 법이다. 몇 시간 전에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들떠 있던 내 마음은 눈을 다치며 바닥을 내 동댕이 쳐졌다. 그리고 낙차 효과로 산산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