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남과 비교를 해서 좋을 것이 별로 없다. 물론 비교를 해서 배울 점을 찾을 때만은 좋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자격지심을 느끼거나, 우월감만 남을 뿐이다. 브리즈번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는 양복을 말끔히 입은 승객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저렇게 브리즈번으로 가는 것이겠지?’
‘그에 비해 나는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곳으로 향하는구나.’
구태여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드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자기 비하를 하며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었다. 그 탓인지, 나에게 정말로 벌이 떨어졌다.
비행기가 떠오르고 캔버라는 빠르게 저 먼치로 사라졌다. 구름 위로 떠 오른 비행기는 안정권에 다다랐는지, 안전벨트의 등이 꺼지고는 어느 비행기에서도 나오는 “안전벨트의 등이 꺼졌지만,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안전벨트를 메세요.”라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5분 정도 흘렀을까? 비행기가 난기류와 접했는지 약간 흔들리며 다시 안전벨트 등에 불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마치 비포장도로 위에 자동차로 지나가는 듯한 덜컹거림 정도였는데, 10분이나 계속되었다. 곧 끝나겠지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더 격렬해졌다. 이제는 상하로 들였다 놓았다 하며 롤러코스터를 타고 떨어질 때 같은 무서움. 나는 롤러코스터를 싫어한다. 고소공포증이 있이서라기보다는 오장육부가 마치 물에 쓸리는 것 같은 느낌이 싫었기 때문이다. 비행기의 터뷸런스가 그 느낌을 상기시켜주었고, 무서움을 참고자 하는 내 의지 따위는 별 것 아니라는 듯, 한 순간에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여태껏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기분. 벨트를 풀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 비행기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었다. 단순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그리고 든 생각이 ‘미칠 것 같다’였다.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손으로 팔걸이를 꼭 쥐었다. 그래도 이성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승객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나처럼 팔걸이에 손을 올려놓고 가장자리를 꼭 쥐고 있었다. 나는 지푸라기를 쥐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외간 남자가 갑자기 외간 여자의 손을 잡는 것이 가지는 리스크 따위는 생각지 않았다. 손을 잡고 난 뒤였지만, 일단 나는 그녀에게 동의를 구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땀에 젖은 손바닥이 미안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지금 정신이 아늑해지기 전에 무엇이든지 해야만 했다. 얼마나 더 흔들렸을까, 난기류를 빠져나왔는지 기내가 다시 안정을 찾았다. 나는 그제야 동의 없이 잡은 손에 대해서 사과를 했고, 그녀는 이해한다고 하며 웃어 보였다.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할 때까지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큰 흔들림 없이 편안했다. 처음 느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 무섭기도 하고 미칠 것도 같은 기분. 후에 나는 그 상태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의한 공황발작 Panic Attack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공황발작 은 곳곳에서 나를 엄습하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헤매는 바람에, 내 예상과는 달리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는 이미 저녁 8시가 넘어 막 어둠이 내린 상태였다. 지도 앱을 보면서 캐리어를 끌고 가고 있는데 앞쪽에서 모자를 쓴 남자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도로 위의 헤드라이트가 나를 향하고 있어서 그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는데, 마치 원주민인 것 같았다. 나는 호흡이 가팔라졌다.
‘혹시나 내가 타깃이 되지 않을까?’
나는 급히 움직였다. 상대방의 얼굴을 피해, 땅바닥을 보면서 재바르게 발을 놀렸다. 내 걱정은 기우였고, 그는 그냥 행인이었고 내 옆을 스치고는 자기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이제 큰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섰다. 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다른 사람과 마주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고, 심장은 달리기를 하듯이 뛰고 있었다. 스마트폰의 화면에서는 걸어서 10분이라는 안내와 함께 가야 할 방향을 파란색 점선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캐리어를 번쩍 들고는 그대로 안내받은 길을 따라 냅다 달렸다. 숨은 가팔라졌고 팔은 뻐근하게 피로감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거기다가 혹시나 누군가가 나를 발견할까 내 인기척을 최대한 숨기며 발자국 소리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면서 최종 목적지가 가까워지길 기도했다. 걸어서 10분 거리였으니 많이 달리지도 않았을 터인데 아주 먼 길을 뛰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무사히 도착한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집주인에게 미리 받은 열쇠로 집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대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는 온 집 안의 불을 다 켰다. 그제야 길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렸고 그대로 대문에 기대어 앉았다. 뛰어서인지 아니면 식은땀인지 몸은 땀범벅이었고 축축했다. 이런 몰골을 하고 있으면 더 타깃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어디를 가도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같이 자신이 그런 악한 운을 끌어당기고 있는 듯한 모습. 나는 ‘이건 치료를 받으러 온 건지, 병을 얻으러 온 건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집에는 다른 사람도 없었지만 들은 대로 과연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도 침구도, 심지어 주방도구까지도 없었다. 불이 들어오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텅 빈 공간 안에 혼자 덩그러니 들어온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료품을 구하러 집을 나섰다. 집 주변은 밤에 볼 때와는 사뭇 다르게 안전한 주택가로 보였다. 몰로 가는 길에 공원이 보였다. 공원에는 아이와 부모들이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깐 그 광경을 보고는 공원에서 눈을 돌렸다. 아니, 볼 수 없었다. 다시 심장박동이 심해지면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평화로운 광경이었음에도 불편했다. 몰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많았고 안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많으니 내가 누군가의 눈에 들어 타깃이 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아서였다. 식자재만 사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이 되니 산책을 가는 사람들이 집 앞으로 지나갔다. 그냥 걷는 소리, 말하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불안했다. 나는 집에 혼자 있으니 혹시나 누군가 문 가까이로 다가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밤이라는 사실과 내가 혼자 있다는 것이 불안했다.
다음 날은 병원 예약일이어서 나갔지만, 나는 점점 집에서 나가지 않게 되었다. 식품을 살 때 말고는 밖은 위험하다는 생각에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바깥공기에 배고파지면 뒷마당에 나가는 것으로 대신했다. 점점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어려워졌다.
2주 후 다시 방문한 병원에서 담당의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동공을 다 덮는 특수 콘택트렌즈가 있는데 시력 회복에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양 눈의 시력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 문제도 조금 해소할 수 있는데 어때요? 한 번 써 보시겠어요?”
“얼마인가요?”
“한 천 달러(한화 약 80만 원) 정도 들 거예요.”
큰 금액이었고 통장의 잔고를 보면 망설여졌지만, 일단 눈의 치료가 우선이라 생각하고 만들기로 했다. 며칠 뒤, 콘택트렌즈를 만들러 버스를 탄 나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는 무너졌다. 목구멍까지 차 올라왔던 ‘힘들다’는 말과 함께, 이제껏 참아두었던 울음을 더 이상 가두어 둘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의 말을 따라 다시 캔버라로 돌아가기로 정했다.
이제는 혼자서 더 이상 어떻게 해 나갈 자신이 없었고, 한계였다. 어떻게 콘택트렌즈만 만들자마자 바로 캔버라로 다시 돌아가버렸다. 그런 나에게 캔버라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형이 비는 방이 있으니 일단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해 주었다. 나를 잊지 않고 도와준 형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 형은 이미 호주에 온 지 십 년은 훌쩍 넘었지만, 자기도 초기에 어려웠던 적이 있었고 남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그것을 갚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나처럼 사면초가를 느낀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그 시기를 버텨내는데 도움이 되었던 한 생각이 있었다고 했고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일주일만 생각하기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너무 먼 미래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는 것인데 저 멀리 수개월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예언가도 아닌 주제에 얼토당토 하지 않은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일본을 떠날 때 듣지 않았던 선배의 말을 이번에는 잘 들어보리라 생각하고 그 말대로 해 보았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일주일 뒤면 확실히 예측 가능했다. 예측이 되니 걱정은 사라졌다. 그리고는 그다음 주에 또 한 주를 생각하면 되니, 큰 부담이 없어졌다. 물론 방심하면 어느새 ‘지금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말이다.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안전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렵던 생각은 많이 잦아들어 공황발작을 느끼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게 한 달여를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지내자 마음에 안정이 자리를 다시 잡았다. 그러니 나는 내 트라우마와 공황발작의 조건이 보이기 시작했다. 혼자 있으면 안 되며, 밤에 밖에 있으면 안 되고, 공원은 보이기만 해도 공황발작이 시작되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다가 이제는 왼쪽이 안 보이니, 누군가의 인기척이 왼쪽에서 느껴지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었다. 또한, 심하지는 않았지만 원래부터 고소공포증을 느꼈는데, 이제는 조금만 높아도 바로 공포가 엄습하게 된 것을 알았다. 예전에는 고층 빌딩을 보거나 위에서 내려다보면 고소공포증에 어지러움을 느꼈는데, 이제는 그렇게 높지 않은 육교만 올라가도 공황발작이 일었다. ‘이래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생각이 일순간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럴 때면 나는 한 가지 마법의 주문이 외웠다. ‘일주일만 살자’
그렇게 일주일만 살기를 8번, 2여 달의 시간이 지났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기로 했다. 2달간 중지했던 치료를 다시 브리즈번에서 받기로 정한 것이다. 이 결정에는 나를 잘 알던 일본인 교수님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얼마간의 생활비를 보내주신 것도 크게 작용했다. 이번에는 동양인이 많이 사는 지역인 Sunny Bank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동양인이 많이 산다고 해서 안전하고 다들 범죄자가 아니라는 법은 없지만, 동양인 들 틈 속에서 나는 나를 감출 수 있기에 좋을 것 같았다.
다시 브리즈번으로 왔다. 통장 잔액을 확인해보니 5개월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치료는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최대 일 년이 걸린다고 가정해보면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눈이 성하지 않으니 아직 거리감이 잘 잡히지 않아서 계단을 오를 때는 발을 헛디디거나 물건을 잡을 때도 헛손질을 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좀처럼 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만 통장 잔액을 걱정하면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거나 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호주는 청소일을 해도 잘만하면 생활은 가능하다는 말이 떠 올랐다.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구인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청소라 하더라도 대부분 차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차도 없고 도구도 없어도 되는 구인, 즉 몸만 있으면 되는 것이 나온 것이 있는가 찾아보았다. 좀처럼 입 맛에 딱 맞는 구인은 없었지만, 며칠 만에 한 업체를 찾을 수 있었다. 청소 내용에는 본드 청소 Bond Cleaning라고 적혀 있었다. 구글에 검색해보니 집을 렌트한 사람이 나갈 때 하는 대청소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때는 청소 중에서도 본드 청소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알지 못했다.
일단 조건에는 아무나를 뜻하는 ‘건장한 청년’이라고만 쓰여 있어서, 바로 연락을 했다. 특별한 질문도 없이 일단 3일간은 시험 채용이고 3일간의 청소 성과를 보고 앞으로 본격적으로 채용을 할지 결정하겠다고 말을 들었다. 나는 건장한 청년이란 꼭 집어서 정의를 할 수 없는 말에 한쪽 눈 말고는 건장하니 반올림해서 건장한 청년에 나도 속한다고 혼자서 생각하고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호주의 대학원에 유학을 온 이유가 이렇게 청소나 하기 위한 때문인가?’
전화를 끊고 나서 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나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보다 이 세상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혹시나 사정이 더 나아질까 조심스럽게 기대를 가졌다.
청소 당일, 나는 책임자의 차를 타고 어느 작은 아파트에 도착했다. 집 안에는 이미 이사를 간 뒤여서 텅 빈 상태였다. 예전에 살던 가족은 아이가 있었는지, 벽에는 크레파스나 연필로 쓴 낙서가 아이 키 만한 높이에 그려져 있었고, 부엌은 벽지 색이 원래 무엇이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름때가 누렇게 들러붙어 있었다. 가스레인지도 음식물이 타서 검은 딱지 같이 붙어 있는 언제 청소했는지 모르는 그런 상태.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어떤 찌든 때도 다 제거할 수 있는 세제가 있다는 사실을. 핑크색의 완전 100% 순수한 세제 원액.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냄새에서 맨손으로 담그면 손이 다 탈색되어 버릴 것 같은 강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부엌을 담당을 했고 근 6시간 이상을 오븐과 가스레인지에 몇 년 치의 때를 치우는데 시간을 허비했다.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 일을 해 온 듯 익숙하고 빠른 움직임으로 부엌 이외의 화장실, 방과 마루 등 나머지 공간을 청소했다. 첫날은 세제가 손에 닿기도 했지만, 좀 짓무른 것 이외에는 별 다른 문제는 없었다. 아주 깨끗하게 정리를 하지는 못하고 책임자로부터 지적도 받았지만 처음이라 그런지 그렇게 심하게 화를 내는 것은 없었다.
둘째 날 아침, 손이 저려왔다. 생각보다 몸에 무리가 갔는가 보다. 팔에도 근육통이 있었고 몸은 피로에 무거웠다. 첫째 날과 달리 이번에는 집 크기가 훨씬 컸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세 명이었고 각자가 분담해야 하는 일은 늘어났다. 나는 첫날과 같이 부엌을 청소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부엌 이외에 방도 청소해야 하니 빨리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미리 주문을 받았다.
이번 부엌은 전날보다 훨씬 넓었고 오븐 및 가스레인지 등도 그 크기가 더 커 청소에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오후 2시나 되어서 겨우 마무리를 짓고는 검사를 받으러 책임자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전날과 같은 부분에서 지적을 받았다. 나는 연신 죄송하다고 하며 지적을 받은 부분을 치우려 했는데, 책임자는 한 숨을 쉬면서 시간이 없으니 자신이 하겠다고 했다. 마치 한 숨에서 ‘초짜는 이래서 안 돼’라는 말이 숨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는 그는 아직 손을 안 된 방을 청소하라고 했다.
방에 들어가 보니 벽에는 볼펜이니 연필로 낙서한 흔적이나 손때가 묻어서 거무스럽게 색이 변한 곳들이 보였다. 세제를 스펀지에 묻혀서 청소를 했는데, 벽지가 떨어져 나갈 수도 있기에 힘 조절이 중요했다. 그렇게 저녁 시간이 다 될 때까지 방을 청소를 하고 나니 책임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보통이라면 오후 4시면 끝나야 하는데, 너무 작업 시간이 많이 걸리시네요. 일단 청소가 잘 되었나 보겠어요.”
“네, 죄송합니다.”
“여기도 아직 덜 지웠네요. 이런 건 나중에 관리회사에서 보면 다 감점 대상이라 다 지워야 합니다.”
그렇게 들으면서 지적당한 곳을 봤는데 도대체 어디에 더러운 것이 묻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단지, 하얀 벽지만이 더욱더 빛을 낼 뿐이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벽지 색은 흰색이었는데 왼쪽 눈 때문에 흰색은 더욱 희게 보이고 색은 퍼져 보였다. 그러니 무언가가 묻어서 거무스레한 부분이 내 눈에는 그냥 희게 보였다. 내가 헤매고 있으니 답답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는지, 책임자는 다른 작업자를 불러 내 대신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나는 이틀 만에 해고 통지를 받았다.
다행히 이틀간 일한 인건비는 받을 수 있었지만, 이번 일로 나는 청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노력을 해 오며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 결정한 모든 일들이, 마치 눈을 다치기 위한 행동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일도 못하고 단지 수중의 얼마 남지 않은 돈이 없어지는 것을 두 손을 놓고 봐야 한다는 사실만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진 것이었다.
‘나는 이제 살아갈 값어치가 없는 사람이구나.’
생각이 그렇게까지 치닫자 나는 다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내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말이다. 아무도 나란 사람을 모르면 슬퍼할 사람도 없고, 나도 죽고 난 뒤의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그렇게 되길 바랬다. 실은 호주로 유학을 온 후부터 이런 생각이 머릿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남겨두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사진도 찍지 않았고,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에 졸업식이라고 하면 나오는 졸업모에 졸업장을 든 사진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쁜 생각을 실행하는 방법을 찾으려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에 지배된 나는 어느새 인터넷을 뒤지고 있었다. 예전에 자살을 원하는 사람을 위해 수면제가 파는 블랙마켓과 같은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런저런 단어로 찾다가 우연히 원하던 사이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수면제의 가격을 보고는 자살할 생각이 쏙 들어가 버렸다. 그 이유는 내가 이틀간 청소를 해서 받은 돈을 다 써야만 살 수 있는 가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기분이 상했다. 일단 수면제 값이 비싸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죽을 생각까지 한 내가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한 것에 더욱 화가 났다. 게다가 잘리긴 했지만 이틀간 일을 하던 자신이, 다시 일을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몸을 움직이던 이틀 전의 자신이 생각났다. 마치 죽기 위해서 일을 한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 금액도 그리 큰 금액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아가 치밀었다.
“이게 뭐야? 목숨 값이 너무 싸구려네.”
나는 혼잣말을 했다. 그 순간 내가 죽고 난 뒤의 상황이 떠 올랐다. 내 바람은 내 존재를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것이었지만 가족이 한국에 남아있었다. 가끔씩 연락을 할 때면, 거짓으로 잘 되어가고 있다고 브리즈번이 더 지내기 좋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던 나였다. 만약 내가 죽고 지금 상황을 가족들이 안다면? 언젠가 TV에서 본 한 자살자의 지갑 속 금액이 만원이었다는 슬픈 뉴스가 떠 올랐다. 내가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답이 없었다. 늦깎이에 도전한 결과로 나에게 남은 것은 공황발작을 동반한 정신적인 트라우마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된 몸, 그리고 0을 향해 가고 있는 통장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