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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마음이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

by 다문 DaaMoon

노력의 시간은 그 결실을 맺지 못하고 썩은 열매만을 남겨주었다. 사고로부터 3개월이 지났다. 병원에서는 지금의 속도로 눈이 낫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8월에는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공립병원에서 받으려면 예약이 밀려 있어 1년 후쯤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내 비자가 종료되기 때문에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대안은 없나요?”

“대안은 있지만, 사립 병원에서 받아야 하는 것이라, 개인 비용이 많이 들 거예요.”

“저야 공립이나 사립이나 비용을 제가 다 부담해야 하니, 차이는 없을 거예요. 그래서 얼마나 드나요?”

“글쎄요. 정확히는 병원에 물어봐야 합니다. 그럼, 제가 일단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알아보고 연락을 드릴게요. 그런데 저번에 신청하신 피해자 보상금은 결과가 나왔나요?”


그러고 보니 벌써 2개월 전에 피해자 보상금을 신청했었다. 하지만, 결과까지 최소 6개월이 걸린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는 그렇게 말하니, 수술을 빨리 받으려면 일단은 직접 부담을 해야 한다고 했다. 수중의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렌즈 삽입과 각막 이식을 받을 수 없는 것을 막연히 알았다. 그래도 일단은 확인은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 병원에서 추천한 사립병원의 정보를 얻었다. 나는 바로 그곳으로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찾아간 사립 병원은 나이는 지긋하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의사 선생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나는 일단 사정을 말하고 진찰을 받았다.


“눈을 살펴보니, 지금 남아 있는 실밥을 제거하고, 렌즈를 삽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막의 손상이 심해 어느 정도는 깎아 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럼, 각막 이식을 해야 하나요?”

“그렇죠. 이식을 하지 않으면 너무 흐려서 렌즈를 넣어서 조금 보이게 된다고 해도 크게 도움은 안 될 거예요.”

“그럼, 그렇게 수술을 다 진행하면 금액이 얼마나 될까요?”

“그건 담당자가 따로 있으니, 그분이 설명을 줄 거예요.”


상담을 마치고 진료실을 나서니 회계담당이라는 여자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들은 수술 비용은 다 합쳐서 만 이천 달러. 그것도 내 사정을 봐서 제일 할인을 많이 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 수중에는 삼천 달러도 채 안 되는 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무능’, 나에게 있어서 쓸모없는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해외 생활에서 믿을 건 내 몸뚱이뿐, 즉 혼자서 살아갈 능력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국민이 아니기에 겪어야만 하는 제약을 잊게 해 주는 마법의 주문이야말로 ‘유능’이라는 말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두 발로 이 세상에 설 수 있는 성인이라면 갖출 수 있어야 하는 능력도 안 되는 것이었다. 남은 어떻게 볼 지 모르지만 나는 매 순간을 최선을 다 해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결과가 꼭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듯이 내 상황이 꼭 그랬다. 그래서 멈추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내 입에서 불쑥 한 마디가 나도 모르게 나왔다.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야?”


누구에게라고 꼭 집어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 누군가,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아님 신이든가가 존재한다면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좌절도 충분히 맛봤고 절망도 할 만큼 했다. 하지만, 사방으로 막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건 무엇일까? 확실했던 것은 내 목숨 말고는 남은 것이 없었다. 일단 나도 모르겠다 모드로 들어가서 일주일 동안 침대와 일체가 되어 생리적 현상을 해소할 때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잤다.


시간만 보낸다고 뾰족한 수단이 나올 리가 없었다. 나는 실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포자기로 죽을 생각도 했고, 생각을 고쳐먹고 노력도 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마지막으로 남은 선택지는 이 모든 걸 접고 갈 수 있는 곳,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아직까지도 집에다가는 사고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또 들으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생각하면 더 말하기 어려웠다. 전혀 괜찮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잘 지내고 있다” “직장을 알아보고 있다” 등등 거짓말만 늘어나 놓았으니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을 만큼 멀리 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중에 남은 돈은 한국으로 돌아갈 티켓 값을 빼면 약 5개월간 더 버틸 수 있는 금액이었다.


‘지금 돌아갈까? 아님 5개월 동안 최대한 버텨보고 난 뒤에 돌아갈까? 최대로 기다릴 수 있는 만큼 기다려서 운이 좋게 보상금이 나와서 수술이라도 받고 가면 그나마 나을 것이니 조금만 더 기다릴까?’


지금 한국에 돌아가나 5개월 뒤에 돌아가나 별로 큰 차이가 없다고 결론짓고 남은 5개월 동안 기다리면 혹시나 이미 신청한 피해자 보상금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며 일말의 희망을 거는 것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숨 쉬고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5개월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등 따시고 배 부르면 5개월이 아니라 1년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5개월 후에는 등을 댈 곳은 없고 배는 고픈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앉지도 서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이제는 ‘일주일만 살자’는 주문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때 든 생각이 기도였다.


모두들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 봤을 100일 기도. 이제 더 이상 갈 곳 없는 나에게는 그나마 남은 날을 보낼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스스로는 이제 어떻게 헤쳐나갈 방편이 없다고 생각하니, 혹시나 100일 기도는 물에 빠진 사람의 지푸라기, 아니면 새 동아줄이 되어 나를 이곳에서 빼내 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모토를 ‘일주일만 살자’ 대신에 ‘하루만 살자’로 바꾸고, 그 하루의 일과를 100일 기도로 정했다.


기도 방법은 이렇다 할 것 없이 눈 감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세요.’라고 비는 것 만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몇 시간을 앉아서 무엇을 해야 하는 지라는 물음을 쥐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잠이 오면 그대로 누워서 잠에 들다가, 일어나서 배가 고프면 브리즈번에서 싸게 구할 수 있는 고구마 하나를 먹고, 다시 생각하다가 그것도 지겨워지면 집 문 앞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과 세상의 풍경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쪽 눈으로 반쪽자리 풍경을 보며, ‘세상을 이렇게 보고 있으니 이 세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네. 하지만 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볼 시간도 없겠지?’라며 살짝 ‘시한부 한량’이라는 내 직업에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10일, 30일, 그리고 60일 시간은 잘도 지나갔다. 여전히 보상금 신청은 평가 중이라는 안내만 나올 뿐,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내 집중력만은 점점 올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내 물음만이 내 마음속에 남아 있을 뿐 다른 생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물음에 집중을 잘한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물음에 대한 침묵에도 담담하게 되었다. 이제 기도를 하면 그저 말이 없는 그 누군가에게 더 집요하게 답을 요구하는 자신만이 오로지 존재하는 세상에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100일까지 10일을 남겨 놓은 날이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라.”


내 바람이 하늘에 닿았는지 갑자기 머릿속에서 한 마디 말이 들렸다. 나는 옆에서 누가 말을 하듯이 느낀 머릿속 답변에, 느낌표 세 개의 놀람을 느꼈지만, 결론의 평범함에 ‘그럼, 그렇지’하고 역시 기적은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여전히 답이 없는 보상금 신청 결과에 혹여나 해서 문의를 해보니 여전히 동일한 답변인, ‘6개월에서 일 년 정도 평가에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이제 신청한 지 6개월이 지났으니 조금 더 기다려보라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그래도 이제는 정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뿌듯했다.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고, 더 이상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했다. 그랬다. 이제는 돈도 거의 다 썼고, 100일 기도도 끝냈다. 그리고 든 생각은 ‘그래, 한쪽 눈은 보이지 않지만, 노숙자가 되어도 한국에서는 있을 수 있으니 그렇게 하기로 하자.’이었다. 생각의 문맥과는 달리 슬프지는 않았다.


드디어 호주 생활을 정말로 정리할 때가 왔다. 마음은 호주에 온 이후,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모든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어렵지만 삶과 죽음의 바람을 포기하면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는구나라고 진심으로 느꼈다. 그리고 나는 재빠르게 호주에서 알고 지낸 지인들에게 한국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내 뜻을 전했다. 내 처지를 아는 지인들은 대개 이런 반응이었다.


“그래요? 돌아가는군요.”

“네, 치료는 못 받았지만, 이제는 더 기다릴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어서요. 그래도 괜찮아요. 모두들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

“아쉽네요. 치료라도 마저 받고 가면 내 마음도 편할 텐데…”


말이라도 고마웠다.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감성을 자극하는 어떤 것이 있는 듯, 눈시울을 붉히는 분들도 계셨다. 그렇게 한 분 한 분 연락을 하다가, 한인회를 통해 알게 된 여자분이 그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만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정말로요? 음… 무언가 참을 수 없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보통은 더 기다려도 결과를 받을지 어떨지 모른다고 하고 저는 외국인이라 그렇게 보호할 대상도 아니니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고마워요. 그렇게 얘기해줘서…”


나는 체념이라는 감정조차 다 사라져, 남의 일인 양 내 일을 말하고 있었는데, 마치 자신의 가족의 일인 듯 이렇게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랐고 고마웠다. 그날은 그렇게 짧게 통화를 하고 끊었는데, 그다음 날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그녀의 말이 날아들어왔다.


“제가 납득이 안 되어서요. 그래도 호주인데 한 사람이 이렇게 다쳐서 장래도 불투명해졌고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것 그 자체를 제가 그냥 못 보겠어요.”


무엇이 그녀가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동기가 되었는지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답을 보낼지 모르고 있는데 또 메시지가 왔다.


“제가 알아보니 펀딩 사이트가 있다고 해요. 거기에 한 번 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정부에서 치료비가 안 나오면 직접 돈을 모아서 치료하는 것도 방법이니 말이에요. 그래도 여기서 다쳤는데 여기서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해야 하는 게 맞는 게 아닌가요?”


그녀의 말은 다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이제 더 이상 현실과 싸우기 싫었다. 이제는 어떤 노력 없이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마음이 더 쏠렸다. 나는 그녀와 달리 불만족스럽지도 않았고 이게 내가 다 한 결과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정 생각하기 어려우면 전생에 쌓아둔 복이 없거니 하면 납득도 되었다.


“일단, 이번에 일어난 일을 간단히 적어서 저에게 보내 주시면 제가 영어로 번역해서 보내 드릴 테니 펀딩 사이트에 올리죠.”


그녀는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대화가 전화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고맙습니다’라고 타이핑한 뒤, ‘그럼, 정리해서 보내드릴게요’라고 겨우 적어서 보냈다. 그리고 한 동안 두 손으로 얼굴을 묻고는 한 동안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녀가 보내 준 내용을 그대로 펀딩 사이트에 내 사진과 함께 올렸다. 그리고 기부 목표금은 수술비로 잡았다. 마지막으로 공개 버튼을 눌렀다. 몇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 기부라는 것이 그냥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지.’라며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하루 뒤, 다시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는 “보통은 SNS에도 올려요. 그래야 전파가 되어서 사람들이 알게 되는 거예요.”라고. 그 생각은 나도 했지만 아직도 자기를 조금이라도 보기 좋게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이제 잃을 게 뭐가 있겠어? 안 되면 노숙자인데 밑져야 본전이야.’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그 유명한 파란색 얼굴책 SNS에 내가 올린 펀딩 사이트의 링크를 공유했다.


그렇게 일체의 모든 감정, 생각을 놓아버리고 순수하게 “도와주세요!!!”라고 소리치듯 공유하자마자, 기부가 있을 때 뜨는 알림 메시지로 스마트폰 화면이 빛이 났다. 그 빛에 이끌려 스마트폰을 열어보니 기부금액이 0에서 1,000이라는 숫자로 변해 있었다.


‘누가?!’


기부자를 보니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예전에 일했던 대학교에서 동료직원 중에 하나였던 누님이었다. 기부금과 함께 ‘힘내!’라는 메시지가 쓰여있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렇게 선뜻 큰 금액을 보내 주다니, 내가 이런 큰돈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는 물음이 들었다. 그렇게 감동을 하고 있는데 바로 다른 기부 알림과 함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또 다른 옛 동료의 기부였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다른 기부를 알리는 알림이 연속으로 있었다. 나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리는 알림. 그렇게 그날 전체 모금액의 3분의 1이 모였다.


나는 모금을 제안했던 그녀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의 답은,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죠? 모두가 당신이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사람들은 남에게 기본적으로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틀렸다. 우리는 나와 너로 살기도 하지만, 우리로 살아가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며, 나는 기억하지 못해도 내가 한 따뜻한 말이나 행동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기부를 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하나하나 써서 보냈다.


그다음 날은 일본의 대학교 동료뿐만 아니라, 호주의 한인 분들, 내가 유학했던 대학원의 교수, 그리고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로부터 기부가 있었다. 어떻게 알고 기부를 했을까라는 의문에 SNS를 살펴보니, 내가 올린 내용을 친구들이 공유를 한 것을 알았다. 친구들의 공유는 그들의 지인에 의한 공유로 이어졌고 일주일도 되지 않는 사이에 목표액에 도달했다. 일주일 동안 여전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정리되지 않은 나는 매일을 수십 명의 기부자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는데 모든 시간을 쏟았다. 또한, 나는 바로 병원에 전화를 걸어 수술을 받을 돈이 모였으니, 최대한 빠르게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날을 부탁했고, 그로부터 2개월 뒤 수술을 받게 되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난 뒤에 나에게는 생각하지도 못한 기적이 일어났다. 이제까지 사람들에게 말 못 하고 꾹 참아 온 부끄럽다고 생각한 내 현실, 자립해서 살아갈 방편을 마련하지 못한 무능한 나,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라고 생각까지 했던 나, 이 기적 앞에서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를 낮춰보는 생각까지 모두 놓아버렸을 때, 나는 바뀌었다. 그 바뀐 생각은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내 손을 잡아주기를 바라며 밖을 향해 소리를 치는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손을 쥐어주었다. 마치 그 잡아주는 손 하나하나가 ‘너는 이 세상에서 살아도 돼.’라는 말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그래, 꼭 특별하거나 모든 것을 혼자서 다 잘해야지만 이 세상에 살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야”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그냥 내 마음속의 또 다른 나가 불쑥 튀어 나어서 내 입으로 내 귀에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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