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을 칠해 줄 영감님을 구합니다.

스물두 번째 조각

최근 몇 주간 나는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제 저장해 둔 글도 다 떨어졌다. 이미 지난 몇 주부터, 글독 바닥을 닥닥 긁어 간신히 브런치를 발행했는데, 이젠 없다. 딱 하나의 글만이 남아있는데, 그건 이 브런치 북의 마지막 글로 발행할 거라며 처음부터 정해뒀던 글이라 지금 발행할 수는 없는 그런 글이다.


연말이라 너무 바빠서 그랬을까. 아니면 아이가 방학을 해서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그런가. 무엇이 되었든 나의 글주머니가 고갈되어 버렸다. 큰일이다. 나는 이제 도깨비의 심정을 알 것만 같다. 혹부리 영감의 혹을 노래주머니라 떼어갔던 그 마음과 간절함이 나에게도 생겼다. 이 간절함 정말 오랜만이다. 그리고 반갑지 않다. 써지지 않는 글을 쥐어짜가며 쓰는 글빚쟁이 신세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논문을 쓰던 시절, 항상 나는 구둣방 영감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자고 일어나면 난쟁이들이 요술처럼 구두를 지어놓았다니. 내게도 그런 난쟁이가 있어서 이 밤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연구실 컴퓨터를 켜면 마법처럼 내 논문 한 챕터가 끝나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내가 맛있는 요리, 아니 프랑스 요리 풀코스라도 대접할 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논문의 세계는 동화의 세계와 달리 냉혹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 난쟁이의 마법은커녕 힘들게 써놓은 걸 컴퓨터 오류로 날려먹지만 않으면 감사해야 했다. 어제 쓰던 곳에서 단 한 글자도 더 나아가지 못한 워드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내 난쟁이들은 밤새 뭐 한 거냐며 원망도 하도 할 샤. 알고 보니 내가 난쟁이었다. 밤새서 구두를 만들어야 하는 건 나였던 거다.


우야동 간에, 요는 내 글주머니가 홀쭉해졌다는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것 없다는 말을 믿고 내 글주머니를 뒤집어 탈탈 털어보는데, 이런 푸념밖에는 나오는 게 없는 걸 보니 정말 글주머니가 텅 비어버린 것이 맞나 보다. 근래에 책을 안 읽은 것도 아니건만 왜 내 글주머니가 비었을까. 생각해 보면 아이의 방학을 맞이해 새로운 스케줄에 적응하느라 나는 나만의 멍 때리는 시간을 잃어버렸다. 그동안은 어쩔 수 없는 길고 긴 출/퇴근길 동안 차창 밖의 산과 하늘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글감들을 글주머니에 차곡차곡 채웠는데, 요즘의 나는 너무 바쁘다. 아이의 방학 스케줄도 챙겨야 하고, 새해가 시작했으니 나도 야심 차게 이것저것 해야 한다. 그러니 가만히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볼 짬이 없었고 그 결과 글 주머니가 비어버렸다.


쓰려던 글감들이 있었기에, 그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세상 재미없는 글이 나와 중간에 쓰다 말아버렸다. 나 안수현. 재기 발랄한 글을 쓴다고 내심 뿌듯했더랬는데, 존재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나이 마흔에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가, 이듬해 초에 글쓰기를 다시 접게 생겼다. 도자기 장인처럼 내가 쓴 글을 보며 이건 아니야! 이딴 글은 브런치에 발행할 수 없어!라고 망치로 때려 깨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하겠건만. 구차한 나는 재미없는 글을 붙잡고 전전긍긍할 뿐이다. 참으로 딱한 처지에 놓여버렸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여행을 가야 할까. 멍 때리는 시간을 가져볼까. 아니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여서 그래도 쓰다 보면 써진다아아아!!! 하고 뭐라도 쓰는 시간을 더 가져봐야 하나. 필사를 할까. 좋은 책들을 더 읽어볼까. 영화를 볼까. 친구들을 만나볼까. 도대체 무엇을 해야 글주머니가 다시 갓난쟁이 배처럼 볼록하게 솟아오르려나.


그러니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분들이 계시다면 톰 소여의 담장 칠하기처럼 신나고 재미난 일에 여러분을 초청한다. 나의 뮤즈가 되어주시라! 이 홀쭉한 글 주머니에, 영감을 한 스푼씩 나눠주고 가시면 된다. 딱 한 스푼이면 된다. 톰은 담장 칠하기의 대가로 친구들에게 보물을 받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다. 그저 댓글로 그대들의 영감을 한 조각씩만 나눠주고 가시면 된다. 혹시 아는가. 여러분이 남겨준 영감의 댓글에 감명받아 다음 주 신나게 글을 써서 찾아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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