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번째 조각
최근 유행했던 흑백요리사를 딸과 함께 시청해 오며 얼마 전 최종회까지 다 보았다. 인문학자의 편향된 시선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내 눈에는 이번 흑백요리사 2의 승패를 가른 것은 요리의 맛보다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의 힘이었다고 본다.
아버지와 어린 시절 먹었던 추억의 순댓국이라는 말랑한 서사는 지금까지 쌓아 올린 요리괴물의 이미지와 어울리지도 않았을뿐더러 그 층위가 너무 단조로웠다. 단층구조였다. 반면 최강록 셰프의 서사는 그저 자신을 위해서 공들여 요리를 하고 싶었다고만 전달했지만, 흥미롭게도 대단히 다층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의 쓴 맛을 아는 어른들은 그 한 접시의 요리에서 다양한 감정과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었고, 매혹되어 버렸다.
이야기의 힘이 흑백요리사에서만 드러난 건 아니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딸아이에게 인형을 사주고자 소품샵에 들렀다. 망원동의 그 소품샵은 인형과 소품이 아닌 그야 말고 꿈과 동심, 그에 대한 이야기를 파는 곳이었다. 한 벽을 장식한 동물 인형들은 종류당 하나씩만 나와있었고, 작은 카드에는 손글씨로 이 인형이 어디서 왔는지, 무슨 꿈을 가진 어떤 인형인지 각양의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쓰여있었다. 딸은 핑크색 토끼 인형을 골랐는데, 그 카드에는 어느 날 솜사탕에서 요정처럼 나타난 아기토끼라고 소개가 되어있었다. 인형을 골라 계산대로 가니, 포장을 정성 들여해 주시면서 딸아이에게 인형과 좋은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친구 서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나오는 길, 문득 토끼인형이 있던 빈 공간을 바라봤는데, 그곳에는 "새 친구를 만나 여행을 떠났어요"라는 작은 카드가 놓여있었다. 끝까지 완벽한 정말 마법 같은 경험이었다.
얄궂게도 우리는 며칠 전, 롯데월드의 수족관에 갔다 기념품 샵에서 동일한 인형들을 보았다. 진열대에 아무렇게나 더미로 모여있는 토끼인형들. 상품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포장비닐에서 채 꺼내지도 않고 가격표만 붙여 놓은 그 토끼 인형들을 보며, 나는 그만 메스꺼움을 느껴버렸다. 솜사탕에서 마법같이 생겨난 사랑스러운 토끼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해 시체가 쌓여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토끼들은 이런 상품이 아니었어. 내 아이와 내가 그날 경험하고 우리 집에 데려온 건, 평생 함께 할 소중한 친구였지, 상품이 아니었어. 이건 너무 끔찍해.
이처럼 이야기의 강력한 힘을 경험하다 보면, "인문학의 종말"이 정말 오기는 하는 걸까 하는 의구심도 살풋 든다. 이 인문학의 종말이라는 슬프고도 참담한 이야기는 대강 석사 때, 2000년대 초반부터 들어왔던 것 같다. 하지만 뭐랄까. 죽을 듯이 죽을 듯이 간당간당한 숨을 여태껏 이어오고 있고, 오늘내일 하기는 하지만 소망의 끈이 끊어지진 않은 상태 같다. 말하자면 마지막 잎새랄까. 저 잎새가 떨어지면 나는 죽는 거야..라고 말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병약한 인문학 소녀를 두고 그 마지막 잎새가 끈질기게 안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저 잎새가 진짜 떨어지기 전에, 비바람을 맞더라도 밤새 그려 줄 화가가 필요한데, 과연 인문학을 위한 마지막 잎새를 누가 그려줄 것인가.'같은 생각을 하며 '왜 이제는 예전 같은 천재들이 이다지도 안 나오는 걸까.'같은 한탄도 했다. 나는 인문학자니까. 인문학이 부흥해야 덩달아 춤이라도 춰볼 것이 아닌가. 그렇게 오지 않을 고도씨를 기다리며 인문학의 부흥을 가져올 어떤 흐름을 기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최근의 경험들을 통해 이야기의 힘을 다시금 느꼈고, 인문학 소녀가 오늘내일하며 영영 떠나지는 않겠다는 작은 안도감이 생겼다. 적어도 그녀를 위해 마른 잎새 하나 그릴 시간은 남아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좋아하고, 탐닉하며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다. 나의 이야기가 호응을 받지 못한다면, 그건 내가 독자의 욕망을 건드리지 못한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의 욕망을 건드리는 작가라니. 인간의 다채로운 욕망의 영역들을 고려해 볼 때, 나는 무엇을 건드리는 작가가 되고 싶은가. 나는 내가/사람들이 겹겹이 싸서 숨겨놓은 무엇을 드러내고 싶다. 겉으로 드러나있는 이야기 말고, 한 겹 두 겹 켜켜이 쌓인 층을 들추고 들춰 잊고 있었던 것이든, 소중한 것이든, 아픈 것이든 그 깊은 속에 있는 것을 길어 올려 함께 마시고 싶다. 날것이어도 좋으니, 감추어진 그 벌거벗은 인간을 만나 힘껏 껴안고 싶다. 그런 작가가 되어, 아니 그런 글 단 한 편만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인문학 소녀는 내가 남긴 마지막 잎새를 보고 하루 더 살아갈 힘이 생길 테니.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오늘도 한 편의 글을 또 써서 남긴다.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위급하고 병약한 환자는 나 자신인 것 같다. 매일매일 글을 계속 쓸까, 계속 글을 쓰는게 의미가 있을까, 누가 내 글을 읽기는 할까 등등의 생각을 떠올리며 언제쯤 그만둘까하는 생각도 만지작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했다. 인문학이 골골대는게 오래가든, 아니면 스스로의 작가로서 정체성이 골골대든 병이 길어지면 어떻게든 결말-아니 끝장을 내버리고 차라리 뒤돌아 서면 속이 편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지막 잎새를 만지작 거리는 것이다. 이것을 확 쥐어뜯어버릴까, 아니면 이 손끝의 촉감을 살린 역작을 남길 것인가.
나는 나의 인문학 소녀에게, 내 인생에게 어떤 결말을 남기게 될까.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