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바다 유리

마지막 조각

https://youtu.be/r7SgakkWXdM?si=NqI_WX50jKdxCvAh

핀 조명이 내린 무대에서 신곡을 발표 중인 가수는 보라색 수트를 입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빙그르르르 빙그르르르 난 돌아버렸어, 예전부터 난 돌아버렸어.”

노래하며 돌고 또 돈다.

이렇게 돌아버릴 거였으면 손에 든 저 장미를 머리에 꽂아도 좋았을 것을.


보라색 옷을 입은 미친년.

공연 중인 저 가수는 분명 남성이지만 나는 이 미친년을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고통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내가 손수 머리채를 잡아끌어 다락방에 가둬버린 미친년. 수년간 울부짖어도 황야에 부는 바람 소리라며 외면하고 가둬둔 미친년. 최근에는 잠잠해서 없어졌는가 했더니만 지금 저 무대 위에서 아주 행복하다는 얼굴로 나보란 듯 빙글빙글 돌고 있다.


자 봐라.

이렇게 살아 아름다운 나를 봐라.


빙글빙글 돌아가는 보랏빛. 어떻게 다락에서 뛰쳐 나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 잡으면 다락이 아닌 붉은 방에 가두어둬야 하는 걸까. 어지럽지도 않은지 양팔을 벌리고 행복하다는 얼굴로 돌고 또 돈다. 보라색 꽃잎처럼 팔랑팔랑 돌며 떨어진다.


자카란다.

북반구인 한국이 가을을 맞아 붉게 타오를 때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아공은 자카란다 꽃 덕분에 연보랏빛 봄을 맞이한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아프리카의 봄바람이 불 때마다 대기가 연보라색으로 물든다. 안타깝게도 내가 팔 년간 살던 도시에는 자카란다가 많지 않았으나,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자카란다 거리가 있어서 그곳에 가면 연보랏빛 꽃잎에 잠겨 들 수 있었다. 나는 늘 가보고 싶어 했지만 여덟 번의 봄이 지나도록 한 번도 그곳에 가지 못했다. 빙글빙글 휘몰아치는 보랏빛 꽃바람을 쐬고 싶었지만 나는 그놈의 글빚을 갚느라 시간이 휘고 있었기에 우리 동네에 홀로 서 있는 한그루 자카란다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게 다 글을 쓰겠다 나선 미친년 때문이니 내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지팔지꼰. 스불재다. 그렇다면 다음은 결자해지 아니겠는가. 나에게 고통과 수치를 안겨다 준 이 미친년을 손수 다락에 가둬두고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옆 도시의 자카란다 터널을 보러 떠나야 마땅하다.


행복해 죽겠다는 저 미소, 빙글빙글 끝도 없이 돌아가는 저 미소는 이제 보랏빛 열반에 도달하려 하는 것 같다. 세상 어디엔가는 그런 수도승이 있다고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커다란 플레어스커트 같은 것을 입고 끝도 없이 빙글빙글 돌며 기도하는 수도승들. 회전하는 데르비쉬. 빙글빙글 돌며 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세상에 흘려보내며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우주의 움직임. 다락에 가두어도 저렇게 빙글빙글 돌아 우주를 불러들여 어디에나 있게 되었나 보다. 저 보라색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나의 마음이 슬프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내가 버린 것이 저것이로구나.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나도 함께 저렇게 돌고 돌아볼까.

저 보랏빛에 함께 물들어볼까.


그제야 가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젠더리스한 오묘한 목소리. 세이렌의 목소리가 이랬을까. 개츠비를 파멸로 몰고 간 그린 라이트가 이 보랏빛처럼 나부꼈을까. 겉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저 나부낌을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할 고통을 나는 이미 맛보아 알지 않던가. 그것이 치 떨리게 무서워서 도망쳤다. 미친년이라고 다락에 가둬뒀다. 그러니 나는 저렇게 보랏빛으로 핑글핑글 돌 수는 없다. 나는 두 발로 똑바로 서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시간의 물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고집스레 오늘을 버텨내야 한다.


하지만.

하지만 그 연보랏빛 물결이 고집스레 디딘 내 발목을 휘감고 나도 모르게 나는 서툴게, 비틀거리면서 돌고 말았다. 멈춰가는 팽이처럼 볼품없고 위태로운 한 바퀴였지만 물살에 힘입어 한 바퀴 더, 한 바퀴 더. 파도에 휩쓸린 유리조각처럼 사정없이 구르며 엉망이 되면 어떤가. 아름답고 매끈하게 돌지 못하는게 못내 아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돌고 있는 내가 점차 신이 나지 않은가.


꼴사납지만 신나게 돌며 나는 자카란다 휘날리는 연보랏빛 길을 걷는다. 그렇게 보랏빛으로 돌고 돌아 하나의 바다 유리가 될 것이다. 나의 딸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지만, 아직 찾지 못한 보라색 바다 유리로 딸에게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