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삼겹살 사실래요..?
10. 삼겹살을 사 왔더니 숙소에서 취사불가하다는 답을 받았다.
다음 날은 피르스트 액티비티를 즐기다 휴대폰을 잃어버렸다. 스위스는 과연 인생 여행지가 될 수 있을까?
"숙소에 취사가 안된다고요?"
스위스 인터라켄 역에 내려 바로 앞에 있는 마트 장을 모두 보고 숙소에 도착해서 알게 된 사실.
이 숙소는 취사가 불가했다.
우리는 이미 신이 나서 삼겹살과 날달걀, 냉동 치킨 너겟을 모두 사 온 후였다.
아니 잠시만, 잘못 안거 아니지? 우리 지금 제대로 들은 것 맞지?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소식인 건지 정신이 차려지질 않는다. 제일 당황한 건 쌍둥이였는데, 쌍둥이가 직접 숙소를 예약했기 때문에 미처 자기가 확인하지 못한 정보에 굉장히 당혹스러운 듯했다. 심지어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기 직전에 조리 시설이 있는지 확인을 미리 했었는데, 그때는 또 다른 숙소라고 생각하고 확인을 했었던 모양이다.
급하게 스위스 여행객 커뮤니티에 이 식품들을 싸게 팔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시간은 이미 저녁을 넘어가있었던 터라 아무도 삼겹살을 사려고도 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우리가 다녀온 마트도 영업시간을 지나있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냥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커피포트를 통해 달걀 정도는 삶아 먹을 수 있었으려나?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 쌍둥이의 자소서를 봐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린다. 허겁지겁 창문을 열었더니 저 멀리 산 너머에 번개들이 쉬지 않고 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멍하니 함께 보고 있었는데, 내일 멋진 스위스 풍경을 보러 그린델발트를 간다는 사실을 깨닫곤 인생이 뭔지 참.. 또 그 의미를 헤아리고 있더라.
화장실에서 꼽등이를 잡고 보니, 잘 시간이다.
이번 유럽여행에서 가장 긴 일정으로 잡아둔 스위스인데, 어제만 해도 너무 많은 일이 있어 어질어질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오늘 비 온다고 2주 전부터 예보가 되어있었는데, 조금 어두운 감이 있지만 그래도 해가 떠있다.
오늘은 일찍 나섰다. 왜냐하면 인터라켄역에서 직접 융프라우 vip 패스를 끊어야 하기 때문이었는데, 교통편이 워낙 다양하고 어렵다 보니 이걸 정하는 것도 참 어려웠다. 현장에서 구매해야 하는 만큼 상황을 미처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허겁지겁 인터라켄역으로 향한다.
다행스럽게 패스를 무사히 끊을 수 있었고, 기차 플랫폼을 확인하여 그린델발트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렸다. 여러 커뮤니티를 통해 기차의 어느 쪽에 타야 푸른 초원을 원 없이 볼 수 있는지를 체크했던 우리는 일찍이 열차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우리는 귀찮아서 제대로 다시 확인을 안 했고, 결국 반대쪽에 앉았다는 슬픈 이야기. 그냥 흘러가는 대로 대충 살아..
몰랐는데,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어린 시절 나름 놀이기구는 빼지 않고 타는 편이라 공포증까지는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모두 어릴 때 뭐든 지기 싫어했던 내 승부욕이 공포증을 이겨낸 것 같더라. 지금은 번지점프는 무슨, 대관람차와 곤돌라도 겨우 타는 수준이다. 그린델발트에 도착하고 우리가 원하는 풍경을 보기 위해선 피르스트로 가는 곤돌라가 필수적이었는데, 몇 번이고 멈추고 조금씩 흔들거릴 때마다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물론 내 떨림이 곤돌라의 흔들림에 더 큰 파장을 줄까 내가 떠는 수준도 조절해야만 했지만.
우리만 단독으로 탈 뻔했던 곤돌라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어떤 외국인 두 분이 곤돌라에 탑승했다. 그러고 조금 가다 보니 아래쪽에서 누군가에게 전달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는지 어느 신호에 맞춰 좁은 틈으로 옷 한 벌을 던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밑을 겨우 보니 누군가 그 옷을 주워서 인사하고 있었고, 잠시 후 첫 번째 정차 지점에서 그 외국인분이 내렸지만 아직도 어안 벙벙했던 우리였다.
곤돌라에서 내리니 내가 상상했던 풍경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럼에도 엄청난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산과 초록색 넓은 잔디, 그리고 곳곳에 피어난 꽃들까지. 이 믿을 수 없는 것들을 못 믿는 게 아니라, 한눈에 보이는 그 순간을 차라리 부정하고 싶었다. 자연이 만든 거대함은 이미 한국에서도 느껴본 적이 있지먼 스위스에서 느낀 감정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곳에서 예쁜 사진을 남기겠다며 치렁치렁한 하얀 원피스를 입고 왔다. 평소 한 번도 입지 않은 스타일인데 여기에서 입으려고 이 부피가 큰 원피스를 한국에서부터 가져왔다니.. 그 옷을 가져가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오늘 입은 순간까지 단 한 번도 후회는 없었는데, 이곳에 도착하니 드디어 후회가 됐다.
이런 거대한 자연 속에서 내가 언제 한번 마음껏 누워볼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가볍고 스포티한 옷(요즘엔 예쁜 스포티룩도 많으니..)을 입고 왔다면 내가 이곳에서 어떤 것까지 경험했을지 모를 일이다. 잔디에 편하게 앉고 누워도 보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멍하니 보다 더 높은 정상까지 올라가 그때밖에 담지 못한 순간들을 담았으려나.
언덕에는 서너 명이 그룹을 지어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사실 경사가 꽤 가팔렀던 거 같아서 저기까지 어떻게 가셨을까 싶기도 했지만 저런 풍경을 두고 먹는 식사라.. 무엇을 먹든 100만 원 이상의 가치를 가졌을 식사가 되었을게 분명하다.
멋진 풍경을 이유로 말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사실 저 가치에 대한 이야기는 저런 추억이 있다는 게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스위스에서 돌아온 1년 후의 내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여행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가도, 삶의 방향성에 '도전'이란 큰 힘이 부여된 걸 보면 내 생각보다도 이 여행을 오래 붙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다들 스위스라고 하면 어떤 사진이 떠오르는가? 나는 초록색 잔디 속에 귀여운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고, 저 멀리에는 넓은 초원에 듬성듬성 미니어처 같은 집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엔 멋있는 산이 있을 거고, 또 그 위에는 설산이 있지 않을까?
나는 날씨 좋은 스위스를 만났음에도, 스위스에 가면 누구나 찍는다는 그런 장면을 못 찍었다. 못 만났다고는 말 못 하겠다. 액티비티를 타면서 혹여나 카메라가 망가질까 꺼낼 수 없었던 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줄이야.
피르스트에는 4가지의 액티비티가 있었다. 우린 절대 무서워서 못 탄 건 아니고, 인기가 그나마 덜하다는 마운틴 카트와 트로티바이크를 선택해서 이용했다. 아, 사실 트로티바이크는 쌍둥이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나만 탔다 (?) 기어코 혼자서 탄 나도 대단하고, 혼자서 곤돌라를 타고 내려간 쌍둥이도 대단하다.
이 액티비티도 우린 평범하게 타지 않았는데 몇 가지 에피소드를 풀어보자면,
1)
마운틴 카트를 타고 한참 내려가던 중에 우리는 번갈아가며 사진과 영상을 찍어주기로 했다. 쌍둥이의 카메라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촬영을 지도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갑자기 쌍둥이가 주머니를 더듬거리다가 등골이 서늘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야, 내 휴대폰 어디 갔어?"
아.. 제발.. 진짜 없다고? 와,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누가 훔쳐가도 찾질 못할뿐더러, 가파른 경사를 카트로 내려온 터라 다시 올라가려고 해도 한 명이 카트를 맡고 있어야 했다. 우선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진 순간, 나는 카트를 잠시 옆에 정차해 두고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갔다. 몇 걸음 올라갔나 갑자기 어떤 남성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Did you lose your cell phone?" (혹시 휴대폰 잃어버렸니?)
"Yes! Yes! Thank you so much"
정말 기적이다. 우리가 떨어뜨린 걸 본 뒷사람들이 그대로 주워서 우리에게 돌려준 것이었는데.. 진짜.. 이거 잃어버렸으면 내내 속상했을 마음이 그려져 더 아찔하고 감사했다. 원래도 덜렁거리는 쌍둥이라 또 내 잔소리 폭격기를 멈출 수 없었던..
2)
쌍둥이는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고 나 혼자 트로티바이크를 타고 멋진 풍경을 감탄하고 있었을 때였다.
아래에서 만나자고 했기 때문에, 사실 풍경을 서서 구경할 여유도 없이 내려가고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풍경을 사진으로 담지 못하는 게 억울했다. (카메라는 깨질까 봐 쌍둥이가 들고 내려갔다)
그런데 어떤 여성 분이 나에게 영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는데, 자세히 보니 한국인 여성분이었다. 어느새 말을 조금씩 트고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 여쭤봤더니, 영국 유학 중에 가진 방학 동안 유럽여행을 다니고 계셨다. 각자 혼자 이 트로티바이크를 타고 있으니 서로 영상을 찍어주는 게 어떻겠냐고 이야기가 나와 딱 한 개의 영상을 찍을 수 있었고, 종종 이 영상을 볼 때마다 참 반가운 감정이 든다.
그리고 한참을 같이 내려오다 결국 일정으로 인해 중간에 나는 속도를 더 내서 쌍둥이에게로 향했지만..
아무튼 그분이 무사히 즐거운 여행을 보내셨길 바란다.
당시 나는 바이크를 타고 내려왔던 이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뒤죽박죽 맥락은 없지만 정말 솔직하게 적어 내려 간 메모.
'스위스가 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고 싶은 나라인지 알 것 같다.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자연만을 바라봤다. 화려함의 기준은 모두 다르지만 어쩌면 시각적으로 가장 화려한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만든 것은 절대 자연을 이기지 못한다.'
쌍둥이를 만났다. 무계획인 우리는 이제 겨우 3-4시가 되었을 뿐인데 계획이 없다. 나는 아직 내가 상상했던 사진을 찍지 못했으니, 그 장면을 만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여 길이 난 대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알고 봤더니 이미 모두 지나친 후였다) 1시간 정도를 걷다 보니 주택가로 들어가게 되면서, 우리는 그린델발트의 일상 속에 들어와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테니스 코트장에 가서 축구공을 갖고 놀고 있는 모습,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정원에 물 뿌리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던 모습, 그리고 언덕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던 라마들.
우리가 평소에 '와 스위스에 살고 싶다, 스위스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행복하겠지?, 거기는 살기 좋은 나라래'라고 말했던 그 이야기들이 정말 딱 맞아떨어지는, 그곳이 일상인 사람들이 정말 존재했구나..!
와, 이 사실을 눈으로 마주하니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었다.(아마도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흠, 한국에 돌아가기 더 싫어진다.
한참 동네를 걷다 카레를 먹고 (맛집이라고 했지만 맛이 없었다) 다시 열차를 타 인터라켄으로 돌아왔다. 숙소에 이렇게 빨리 오다니.. 이 정도면 짧은 일정도 길다고 해야 한다. 어떻게 해도 지지 않았는데 6시에 숙소에 돌아올 수 있지? 계획형인 내가 계획을 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즉흥도 분명히 즐거운데, 알차지 않으면 허무하달까?
그래서 내일은 꼭 일정을 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나는 숙소에 가기 위해 인터라켄역에 내린 순간, 내일 일정을 단숨에 정할 수 있었다.
나는 인터라켄역에서 보이는 저 파란 호수 위에 떠있는 유람선을 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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