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와 함께라면 우린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으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체코 프라하 숙소였는데, 오늘 아침은 비엔나구나.
비엔나는 올해만 벌써 두 번째 방문이다.
심지어 비엔나에 큰 애정이 있어서도,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도 아닌
사실상 경유를 이유로 이곳을 선택했다.
하지만 말로는 새침하게 저래도, 비엔나가 경유의 목적으로 오기엔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다.
몇 개월 전에 온 곳이라고 비엔나 중앙역에 도착해서 이 숙소에 오기까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지도도 보지 않고 왔을 정도로 길이 눈에 익었다.
사실 어젯밤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비엔나로 향하던 기차에서 한국에서부터 골칫덩어리였던 일이 기어코 터져 유럽이란 꿈속에 머물던 나를 깨웠다.
마치 현실로 돌아오라며 누군가 몸을 거세게 흔들어 깨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해결되지도 않을 일이었고, 심지어는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었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시 그 일이 내 곁에 머물러 기생하듯 떨어지질 않았다. 이 기분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정말 고맙게도 쌍둥이는 내 기분을 살피기 위해 일찍 일어나 오늘의 일정을 완벽하게 짜놓았다.
ISTP인 쌍둥이가 공능제(공감능력제로)이긴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현실적으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래, 이렇게 된 거면 정말 예쁘게 꾸며서 최고의 날로 만들자.
아직 한국에 가려면 조금 시간이 있으니 나는 이 꿈을 조금 더 꿔야겠어. 그럴 자격이 나는 충분하다.
"우리 오늘 어디로 가?"
"우선 되게 맛있는 맛집에 갈 거야. 여기에서 스테이크립을 먹은 사람들이 한국 가서도 이 맛이 아른거린다네?"
뚫었던 귀가 막혀 귀찌 신세지만, 이곳을 위해 열심히 사온 귀찌를 귀에 달았다.
그리곤 이 추운 날씨에 굳이 치마를 입고 부츠를 꺼내 신었다.
그래, 오늘은 굳이의 날이다.
중앙역이 이렇게 멀었던가. 어제는 정신없이 이곳에 도착하느라 이 정도 거리가 되는지도 몰랐다.
중앙역에서 트렘 티켓을 구매하고, 잠시 후 도착한 트렘을 타고 시내로 나섰다.
이곳엔 몇 개월 전과 다름없는 일상이 흘렀구나.
눈에 익은 건물들이 몇 차례 지나자 이곳이 여행지라고 여겨지기보단, 저들의 일상인 곳이겠거니 싶다.
전혀 달라진 게 없는 그들의 일상이 새삼 신기하기도, 부럽기도 했다.
어느새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맛집이라 웨이팅이 걱정되어 너무 일찍 온 탓에 아직 오픈 전이란 소식과 함께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친절한 주인은 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기다릴 우리가 신경 쓰였던지 레스토랑 안에서 기다려도 된다며 우리를 쫓아내지 않았다.
다행이다.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도리어 우리에게 되돌아와 얼굴이 막 얼어붙던 참이었다.
식당을 둘러보니 코로나 바이러스에 이 식당도 호되게 당했는지 이를 무찌르자는 문구가 쓰인 글이 식당 한중간에, 그것도 큰 글씨로 써져 있다.
자영업은 아니었지만, 공연계를 다니며 코로나의 위협을 직격타로 맞았던 나여서 이렇게 표현하는 그들의 마음이 백번 이해됐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내 마음도 정리하다 보니,
잠시 후 식당이 오픈했고 우리가 미리 주문했던 스테이크립과 낮술(거의 아침술)이 나왔다.
비주얼만 봐도 왜 다들 이 스테이크립을 잊지 못한다는지 알겠다. 맛을 보니 이를 이해한 수준을 넘어서 이미 나 또한 이 맛을 잊지 못할 거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단맛과 짠맛의 조합이 적절하게 입맛을 돋웠고, 립의 부드러운 질감이 입안에서 녹듯이 흘러 들어가 오래 씹을 필요가 없었다.
사실 그때 힘든 현실이 내 모든 것을 붙잡고 있었던 탓에 고기를 써는 칼질을 오랫동안 할 수는 없었지만 (입맛이 없었고, 더불어 더욱 식사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지금까지도 그 맛이 기억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질 현실인데 고작 그 때문에 이 맛있는 음식을 남기다니. 1년이 지나 느낀 이 허탈감에 다시 비엔나를 찾아야겠단 생각을 한다.
다음 일정은 멋진 카페에서 우아한 커피 한잔이다.
광장으로 향하는 길이 익숙하지만 낯설다.
여름엔 이 광장에 화장실을 찾기 위해 서둘렀던 기억 탓이었을까.
광장에 이르자 슈테판 대성당이 보인다. 여름의 이곳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는데 겨울엔 코로나 바이러스를 무찌르자는 문구로 바뀌어져 있었다.
식당에서도 그렇고 코로나에 대한 강한 의지를 이들은 직접 표현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이전엔 이 성당에 들어갈 생각을 못했는데 일생, 아니 일 년에 두 번씩이나 만난 성당이니만큼 운명이겠거니.
우리는 운명의 입구로 들어섰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고딕양식 건축물인 슈테판 대성당은 12세기부터 건축되기 시작했다. 성당 내부의 중세 귀중품 등을 통해 화려했던 그들의 역사를 한눈에 지켜볼 수 있었다. 도시 자체가 예술인 곳이라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집약해서 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묘미였다.
불이 붙은 초들이 모인 곳에 가니 무언가가 참 간절한 사람들이 그 앞에 서 그들의 마음을 풀어내고 있었다. 나 또한 그곳으로 이끌린 몸을 굳이 거부하지 않고 앞에 서서 내 마음을 읊었다.
1년이 지난 이후 그 소원이 이루어졌냐 누군가 묻는다면, 음.. 반 정도는 이루어졌을까?
슈테판 대성당이 구시가지에 위치한 만큼 그 주변으론 기념품샵이 참 많았다.
우리의 미션은 이곳의 맞은편에 있다는 기념품샵에 가서 유명한 초콜릿을 사는 것.
그런데 문제는 아까 말한 듯 기념품샵이 참 많다는 것이었다.
우선 눈에 보이는 곳부터 들어가 보기로 한 우리는 연달아 두 곳을 들어갔지만 잇따라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 남은 곳은 저기 하나다.
허겁지겁 들어간 상점 안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물건을 순조롭게 고르기는 글렀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누군가 제품을 집으면 우리는 따라 집는다. 우리가 제품을 집으면 누군가 그 제품을 따라 집는다.
계산하는 것도 한참 걸렸지만 다행히 이곳에서 누군가의 선물을 산 것에 만족한 우리.
물론 우리가 산 게 어떤 맛인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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