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Y_HOME
몇 년전, 모 지역의 모델하우스를 방문했다. 단지 특장점을 설명해주시는 분이 독특한 옵션을 말씀하셨는데 바로 '다도실'이었다. 해당 옵션을 선택하면 건설사에서 시공할 때 세대 내에 작은 다도(茶道) 공간을 배치한다는 것.
최근 집을 '거주'뿐만 아니라 다른 용도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은 계속됐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요즘 건설사에서 안방 혹은 자녀방 외에 별도로 제공하는 '알파룸'이란 공간이다.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알파룸을 개인 서재로 꾸밀 수도 있고 게임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나만을 위한 PC방을 만들 수도 있다. 가구원 수가 줄고 개개인의 라이프 스타일이 존중받는 시대적 분위기를 타면서 가족 구성원이 원하는 방식으로 꾸밀 수 있는 알파룸이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러한 집의 개념이 확장되는 추세는 팬데믹 사태로 인해 더욱 가속화됐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장기화되면서 모든 생활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히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대부분의 활동을 집에서 보낸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국내에서 퍼지기 시작한 시점, 나는 다니던 운동시설을 그만뒀다. 몇 개월 남은 기간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마스크를 낀다고 해도 '혹시 나도 걸리면 어쩌지?'하는 공포감이 더 컸기 때문에 아까워도 하는 수 없었다.
한달에 한번 이상 가던 영화관도 못 간지가 오래됐다. 그나마 꾸준히 하던 문화생활인데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 영화관은 팬데믹 사태에서 엄두도 안 나는 여가활동이다. 영화는 역시 큰 스크린으로 봐야 제 맛이지! 하는 사람이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다. 맛집투어도 힘들어졌다. 한동안 정부에서 집으로 포장 또는 배달해서 식사하라는 캠페인을 벌였기도 했고 식당에서 확진자와 접촉하는 사례도 많아서 겁이 났다. 더더욱 혼자서 먹기 힘든 메뉴가 있는데 친구를 만나기가 꺼려지면서 카페와 작은 바는 물론 밥집도 갈 일이 적어졌다.
모든 활동은 집에서 이뤄진다. 집에서 배달해서 밥 먹고 넷플릭스를 구독해서 영화를 본다. (운동은 조금...?) 김난도 교수님이 발간하신 도서 <트렌드 코리아 2021>에는 '레이어드 홈'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집이라는 공간의 개념이 과거보다 다양해진 현재의 모습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집콕족, 홈족, 홈루덴스족 등 이미 비슷한 의미를 지닌 용어가 있지만 더욱 입체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레이어드 홈을 이루는 층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집의 보편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수면, 휴식 등인 '기본 레이어'다. 가장 기초적인 집의 역할이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투자해 자신만의 안식처를 고급스럽고 편안하게 꾸미고 있는 추세다.
두 번째는 '응용 레이어'다. 보통 외부에서 하던 활동이었지만 여러 이유로 집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뜻한다. 기존에 헬스장에서 하던 운동은 홈 트레이닝으로, 카페에서 마시던 커피도 홈 카페로, 영화관에서 보던 영화를 홈시어터로... 모든 활동이 집에서 가능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각자 취향에 맞는 공간으로 맞춤 인테리어 하고 있다.
마지막은 '확장 레이어'로, 주거의 개념이 집+동네로 확장된 개념이다.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만큼 근거리에 편의시설이 있는 곳을 선호하고 있다.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여러 인프라를 갖췄다는 의미의 '슬세권'과 일맥상통한다.
#인테리어 #고액월세 #스몰럭셔리
20대 초중반, 친구와 살 집을 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 작은 아파트가 있었는데 세입자였던 신혼부부가 거주하다가 지방으로 갑자기 발령이 나서 다음 세입자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외관은 오래된 아파트였는데 내부는 전혀 달랐다. 미술을 하시는 아내 분이 개인 돈으로 집 전체를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조명과 벽지 색까지 고려해서 공 들여 리모델링 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계약하고 싶다'라는 생각과 함께 '자가도 아닌데 이렇게까지?'라는 의문도 있었다. (계약하고 싶었는데 친구 회사와 거리가 너무 멀어서 결국 포기했다. 흑 ㅠㅠ)
하지만 이젠 전월세로 거주하더라도 인테리어에 돈을 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오늘의집, 집닥, 집꾸미기 등 인테리어 비교견적 중개 플랫폼 기업의 성장세가 두드러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인테리어 비교견적 중개 플랫폼은 지난해 거래액이 전년 대비 50% 늘어났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근에 다방에서 자료 하나를 공개했다. 다방 앱에 등록된 서울 월세 매물 빅데이터를 전수조사해 월세 100만 원 이상의 고액 월세 매물을 확인한 것. 다방의 서울 단독(다가구)·다세대·연립주택 및 오피스텔 전체 매물 중 6.4%가 월세 100만 원이 넘었다. 2019년과 비교해 2.6%p 증가한 수치였다.
서울에서 방을 구해보면 보통(보증금마다 천차만별이지만) 원룸 월세는 40~50만 원 정도다. 하지만 데이터에 따르면 원룸 월세 매물 중 3.23%가 월세 100만 원 이상이었다. 적은 비중 같이 보이지만 내 월급을 떠올리면 주거비에 이렇게 돈을 많이 쓴다는 것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집콕족 #홈트 #홈카페 #홈바
붉은 톤의 네온사인이 인상적인 '나래바'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개그우먼 박나래가 자신만의 홈바를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종종 친구들을 초대해 프라이빗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수다를 떠는 공간이라고 소개해 많은 자취러들의 로망에 불을 지폈다.
인기 유튜브 채널 <땅끄부부>는 홈트 영상으로 유명하다. 집에서 따라할 수 있는 운동방법, 식이요법 등을 소개한다. 날씨에 구애 받지 않아도 되고 코로나19 확산세로 헬스장에 가기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운동할 수 있다는 점이 홈트 열풍을 이끌었다. 그들의 집에는 매트가 깔려 있고 몇몇 운동기구가 놓인 방이 있다.
인스타에 해시태그로 '홈카페'라는 키워드가 있는 게시물을 검색해 봤다. 예쁜 식탁보와 간단한 디저트, 그리고 귀여운 컵에 담긴 음료까지~ 유명 카페 인증샷처럼 집에서 카페 분위기를 낸 사진이 379만 개나 주루룩 나왔다. 해당 키워드의 인기로 몇몇 소품가게는 홍보를 위해 홈카페 키워드를 활용하기도 했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 <1호가 될 수 없어>에서는 이은형, 강재준 부부의 이사한 새집이 공개됐는데 거실을 캠핑 콘셉트로 꾸민 게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코로나19 여파로 캠핑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 거실이나 베란다를 캠핑 느낌으로 꾸미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집에서 캠핑을 즐기면 무슨 재미일까 싶었지만 이은형, 강재준 부부가 캠핑의자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 보니 부러웠다.
홈시어터족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탐나는 공간이었는데 집에 좋은 빔프로젝터나 홈시어터 등의 기기를 두고 거실 극장 또는 내방 극장을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한 온라인 커머스 업체에 따르면 지난 1월 동안 홈시어터의 판매량은 전년 대비 34%, 빔 프로젝트는 41%나 증가했다.
#슬세권 #슬리퍼만_있으면_어디든갈수있어 #생활인프라
어느 순간부터 부동산 시장에서 '슬세권'이란 용어가 보이기 시작했다. 슬리퍼+세권을 합친 것으로, 슬리퍼처럼 편한 복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편의시설이 많은, 입지 좋은 주거지역을 뜻하는 말이다. 팬데믹 상황이 이어지면서 슬세권이 더욱 주목 받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집의 개념이 동네로까지 확장되면서다.
나의 지금 생활만 봐도 알 수 있다. 집에 되도록 있으려면 많은 식재료가 구비돼 있어야 하지만 원룸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 물건을 가득 채우기가 어렵다. 적은 양의 식재료가 파는 곳이 다행히 가까이 있다. 바로 편의점! 작디 작은 냉장고를 보완한다.
또, 코앞에 위치한 작은 밥집이 있는데 거의 기숙사 식당처럼 이용한다. 한 끼 6천원 정도면 해결 가능하다. 식사 후에는 오피스텔 바로 아래에 있는 카페에서 테이크 아웃으로 식후 커피까지 즐긴다.
▼▼ 슬세권에 대한 글이 더 있어요!
슬리퍼 신고 어디까지 가봤니 (brunch.co.kr)
오늘은 '레이어드 홈'이란 키워드 하나로 주거 트렌드를 살펴봤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부추긴 이 트렌드는 팬데믹 사태 이후에도 1인가구 증가세와 함께 쭉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혀 예쁘게 살지 않는, 최소한의 여건으로 사는 나조차도 '레이어드 홈' 바람을 느끼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홈시어터룸을 만드는 그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