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 교집합과 합집합
"우린 합이 참 좋았죠"
- 그동안 감사했어요 쌤. 잘 지내세요. 또 봬요.
- 또 보면 좋겠지만, 안 보면 더 좋겠죠? J 씨도 잘 지내요!
작년 가을, 이런 인사를 나눈 지 3개월 만에 나는 응급실을 찾듯이 다시 그 소파에 선생님과 마주 앉게 되었다.
- J 씨,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 안녕하세요 쌤. 전 제가 잘 지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뵙게 됐네요...
- 그동안 좀 어떠셨어요?
- 이전에 제가 말씀드렸었잖아요. 지금은 저 괜찮아 보이지만 그 사람이 저를 이제 더는 안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런 때가 오면, 그게 아마 제 바닥일 것 같다고... 때가 온 것 같아요.
- 무슨 일이 있었나요?
- 2주 전이었어요. 여느 때처럼 저희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고, 그 사람에게 받을 물건이 있다는 핑계로 또 만나서 저녁을 먹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이제는 지쳤대요. 이런 관계는 서로에게 좋지 않을 것 같다고, 자기는 6개월 동안 많이 힘들었다고... 이제 더는 힘들고 싶지 않다고 저를 영영 떠나겠다고 했어요.
- 그랬군요. 그때 기분이 어땠나요?
- 미친 사람 같이 울었어요. 저는요, 사실 저에게 선택지가 있는 줄 알았어요. 모든 일을 없었던 걸로 하고 그에게 돌아가는 것, 혹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것. 그런데 사실은 그에게도 선택지가 있었던 거죠. 저는 어쩌면 지난 6개월 동안 선택을 미루고 있었던 것 같아요. 머리로는 답을 정해놓고 차가운 말을 내뱉고는 마음속으로는 하나도 멀어지지 못한 거죠. 그런데 오히려 그 사람은 제 말에 상처받고 점점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예요.
- 그래서 J 씨는 어떻게 했나요?
- 저 진짜 구질구질하게 매달렸어요. 2주 전에 저에게 저렇게 말하고 다음날 파리로 출장을 갔거든요 그 사람. 비행기 문 닫히는 순간까지 울면서 제발 가지 말라고, 너 그렇게 가버리면 나를 영영 떠나는 것 같다고, 나 혼자 남겨두지 말라고. 전화를 걸어서 오열했어요. 그리고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반쯤 미쳐 있었죠. 그때 상담을 다시 신청한 거예요.
- 지금은 좀 어떤가요?
- 다행히 지난 주가 설 연휴라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고, 어제는 또 제 생일이었거든요. 많은 축하를 받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혼자라는 느낌에서는 좀 벗어난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정말 이 우주에 저 혼자 있는 기분이었거든요.
- 그럼 그 사람과 헤어지지 못하는 건 외로움 때문인가요?
- 그건 아니에요.
- 그럼 왜 헤어지지 못할까요?
- 궁금해요. 그 사람이. 지금 파리에서 오고 있거든요. (시계를 힐끗 보며) 이제 비행기 내렸겠다. 듣고 싶어요. 파리는 어땠는지, 뭘 봤는지, 뭐 먹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요.
- 그게 왜 궁금하죠?
- 재밌으니까요. 그 사람의 생각을 듣고 대화를 나누는 게 좋아요.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요.
- 이제 남인데요.
- 그렇네요. 그렇게 생각 안 했나 봐요... 제가 아직도 못 받아들이고 있었네요.
- J 씨가 이번 상담을 통해 얻고 싶은 건 뭐예요?
- 결국 결정은 제 몫이겠지만, 지난번에는 제가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답을 알고 싶다고 했었잖아요. 이번에는 제가 어떤 결정을 하든 그 결정을 믿을 수 있는 제 자신에 대한 확신과 용기를 얻고 싶어요.
- J 씨는 벌써 정답을 찾은 것 같네요.
- 그 사람은 J 씨에게 왜 그렇게 특별했을까요?
- 한국 사회에서는 누구나 그랬겠지만, 저도 어릴 때부터 늘 경쟁 상황에 놓여있었어요. 가장 친한 친구들이 곧 경쟁자였죠. 가족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시험 앞에선 늘 순위가 매겨지죠. 친구가 1등 자리에 앉고 제가 3등 자리에 앉는 건 너무 슬프거든요. 우리는 친구이기 전에 경쟁자예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제 약점을 드러낼 수 없었죠.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서 좀 옅어졌지만 그때는 그랬던 것 같아요. 약점을 들키면 지는 거다. 무조건 쎄 보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세상을 경쟁자 아니면 경쟁 밖의 사람. 이렇게 2가지 분류로 나눴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은 저에게 두 범주 밖에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죠. 가족을 제외하고는.
그 사람에게는 제 약한 모습들을 많이 드러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진짜 제 모습일지도 모르는 모습들을요. 지금 대학원 다니는 것도, 사실 저 진짜 하기 싫었거든요. 엄마 아빠가 좋아할 것 같아서, 회사에서 잘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동기들이 부러워할 것 같아서 지원하게 됐고 합격해서 좋기도 했지만 막 울면서 수업 들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그 사람은 저에게 이거 진짜 네가 원해서 하는 거 맞냐고 물어봐준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제가 그 선택을 하든 안 하든 저를 사랑해 줄 사람이었고요.
그래서 그 사람을 영영 잃는다고 생각하니 제가 껍데기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이번 설 연휴 때 부모님 댁에 갔는데, 마음이 불편한 거예요. 여기도 내 집이 아니고, 저기도 내 집이 아니고. 세상에서 제 집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었죠.
- J 씨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요. J 씨는 그 사람을 또 다른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나의 분신처럼, 또 다른 자아로요. 그래서 지금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그 사람과 헤어지는 건 곧 자기 자신과 헤어지는 것이니까요.
그 사람은 곧 나고, 나의 분신이고 나의 자아니까 늘 나와 같은 마음을 느끼고 나와 같이 반응해 주길 바랐던 거죠. 하지만 그 기대가 깨진 순간 이제까지의 판타지가 깨진 거죠.
J 씨는 그 사람과 헤어지던 날, 그 사람이 J 씨 손을 잡고 일어섰다면 그 사람과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었죠? 아니에요. 판타지는 언젠가 깨지기 마련이니까요. 그 순간이 아니었더라도 서로는 서로가 타인임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었을 거예요. 그 사람과 나는 다른 사람이고, 그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라는 걸요.
- 저 아는 언니는 남편을 결혼정보회사를 통해서 만났거든요. 그 언니가 제 이야기를 듣고 이러더라고요. "야, 너는 기대가 너무 커서 그래. 난 있지, 남편에 대한 기대가 없었어. 그 사람은 당연히 자기가 나보다 우선이니까, 그 상황에서 날 안 선택하는 게 당연하다. 난 그렇게 생각하고 상처 안 받았을 것 같아. 그런데 넌 10년을 만나고 사랑했으니, 그랬던 게 이해는 된다"고요.
이제야 이해가 돼요. 언니의 말도, 6개월 전 그 사람의 글도.
그 사람도 저에 대한 기대가 컸을 거예요. 자기가 내 손 잡고 못 일어나더라도 나라면 자기를 이해해 줄 거라고요. 나는 너고, 너는 나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결국 타인이었던 거죠. 제가 화가 났던 건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였는데, 사실은 '내 분신아, 내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였던 거네요. 웃기다...
- J 씨, 집합 알죠? 너무 당연한 질문인가. 집합에서 처음 배우잖아요. 교집합과 합집합.
인정해야 해요. 그 사람은 J 씨의 분신이 아니거든요. 그 사람은 그냥 또 다른 집합 B인 거예요.
집합 A와 집합 B가 만나서 사랑을 하면 교집합이 생기죠. 하지만 교집합이 크다고 그 관계가 꼭 좋은 관계일까요? 교집합이 점점 커져서 A를 뺀 B가, B를 뺀 A가 작아지는 게 꼭 좋은 관계는 아니에요.
둘은 20살에 만났으니, 그 교집합이 참 많이 컸던 거죠. 어쩌면 A와 B의 교집합이 작은 관계가 오히려 합집합은 더 클 수 있어요.
그 사람에게 내어주었던 교집합을, 본인의 자아를 이제 J 씨 안으로 가져와요. 많이 힘들고 아플 거예요. 하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래야 J 씨가 살아요.
그 사람에게 맡겨두었던 내 모습을, 내 자아를 내 안으로 들여와요. J 씨는 그와 헤어지고 나를 이렇게 봐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두렵다고 했잖아요. 그 자아를 내 안으로 들여오면 이제 두렵지 않을 거예요. 내가 내 자신을 그렇게 봐주거든요.
눈물이 났다. 나는 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사람이 입는 옷이 멋져 보였고, 그 사람이 듣는 노래가 아름답게 들렸다. 그 사람이 먹는 음식은 맛있어 보였고, 그 사람이 고르는 건 다 정답으로 느껴졌다.
그 사람도 나에게 그런 순간들이 있었겠지? 그렇게 10년을 지냈으니 우리의 교집합은 점점 커졌고, 그를 뺀 나는, 나를 뺀 그는 점점 작아졌던 거다. 하지만 우린 결국 다른 집합. A=B가 될 수 없다.
- 영영 멀어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두려워요.
-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둘이 다시 만나게 되든 아니든 이 과정은 둘에게 꼭 필요해요. J 씨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도요. 서로가 타인임을 인정한 후의 관계는 더 건강한 관계가 될 거에요.
어느새 상담 시간이 끝나서 나는 현관문을 부여잡고 기도하듯이 두가지 질문을 던졌다.
- 저희는 건강하지 않은 연애를 한 걸까요?
-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네요. 하지만 언젠가는 깨질 수밖에 없는 판타지였죠.
- 우리는 언젠가 서로를 만났던 것을 후회할까요? 전 어떤 순간이 와도 그럴 것 같진 않거든요. 세상에서 이런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드물잖아요. 진짜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요.
- 맞아요. 둘은 합이 참 좋았죠.
문을 열고 나오니 바깥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다. 춥다. 지난번 상담 때는 문을 닫아 아쉽게 먹지 못했던 고등어조림을 먹으러 가야겠다.
너는 피곤한 표정으로 짐을 찾고 있겠지? 이번 비행으로 모닝캄이 되었으니 짐이 빨리 나와서 좋아했으려나? 어쩌면 지난번 출장처럼 아직도 집에 못 가고 공항 벤치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파리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신메뉴로 묵밥이 나온다는데 기절한 듯이 자느라고 맛도 못 봤으려나? 2주 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먹고 싶은 음식은 뭘까?
나는 여전히 궁금한 게 참 많다. 나는 너였고, 너는 나였으니까.
우리 사이에 쳐져 있던 8시간의 장막은 이제 걷혔다.
그리고 판타지도 끝났다.
판타지 밖에서도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