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동안 나는 단 하루도 일기를 쓴 적이 없다. 귀찮았거나 게을러서 그랬던 건 아니다. 네가 항상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내 하루하루를 다정하게 들어주던 사람이다. 네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면 내 목소리가 음표가 되어 노래처럼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건 아마 네가 나의 작은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 주었기 때문일 거다. 그것도 아주 따뜻한 눈빛과 함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기적 같은 순간들이었다. 우리의 매일매일은.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빛이 이런 거구나, 처음 느꼈던 순간을. 그건 우리가 처음으로 삼청동에 갔던 날이었다. 그날은 무더운 여름이었고, 더위를 많이 타는 너는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땀을 닦아내면서도 내 손은 절대 놓지 않았다. 우리는 처음 와 본 삼청동 거리를 걷다가 걷다가 결국 골목 제일 끝에 있는 2층짜리 카페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람이 거의 없어서 테라스 자리에 앉았더니 바람이 솔솔 불어왔던 기억. 처음으로 너와 얼굴을 맞대고 찍은 셀카. 날 보는 너의 수줍으면서도 사랑스러운 눈빛. '사랑을 하면 바람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는 건가?' 했었다.
10년 동안 내 일기장은 하루도 빠짐없이 빼곡히 채워졌다. 내가 1년 동안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에도 우리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네 편지를 읽고 왈칵 쏟아지던 눈물. 금요일 밤 파티에 간 친구들이 빠져나가 조용한 기숙사 방에서 너와 밤새 통화하다 뜨거워진 전화기.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 나를 데려다주던 길을 혼자 걸으며 네가 들었다던 노래들. 그런데 참 신기하다. 우리는 13시간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교환학생 시절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기억들은 다 너와의 기억들 뿐이라는 게.
우리가 헤어지고 나는 심리 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나는 선생님에게 우리의 기억을 함께 추억할 사람이 이제는 곁에 없다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그 사람은 떠났지만 아름다운 기억은 마음속에 남아있고, 꼭 그 사람과 함께 추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하셨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하신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아니면 그 기억은 힘이 없는걸요. 어떤 기억들은 너무나 행복한 꿈같아서 나는 때때로 그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근데 있잖아, 우리 그때 여기 가서 이것도 저것도 했던 거 맞지? 꿈 아니지?"라고. 그럴 때마다 그는 꿈이 아니라고, 자기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지 않냐며 나를 보고 웃었다. 그렇게 환하게 웃어주던 그는 이제 내 곁에 없고, 내 일기장은 6개월 전에 멈춰있다.
좋았던 기억들은 오히려 점점 선명해져서 나를 슬프게도 괴롭게도 했다. 때로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처럼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덜 괴로울까 바보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기억들은 여전히 나를 살게 한다. 그와 걷던 광안리 바닷가를 나 혼자 걸을 때, 환하게 웃던 나를 카메라에 담던 그가 생각나서 나도 웃었다. 그가 좋아하던 평양냉면을 먹고 싶어질 때면 내 입맛이 언제 이렇게 변했지 놀라기도 한다. 그와 손을 잡고 걷던 서촌의 담벼락은 여전히 내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이렇게 그를 닮은 나는 이제는 마음에 그를 담고 오래된 일기장을 다시 써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다짐한다. 그가 나에게 그래줬던 것처럼 내 하루를 따뜻하게 바라봐 줘야지. 스스로에게 더 다정하게 말해줘야지. 오늘 하루 어땠냐고, 오늘도 참 수고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