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우울의 늪에서 욥기에 대한 묵상 [티끌과 재 위에서]
말은 무게를,
그리고 향기를 담는다고 믿습니다.
저는 마음의 결을 따라 글을 쓰고,
다 담지 못한 감정은 피아노 선율로 표현합니다.
글은 향기로, 음악은 숨결로 남아
조용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돌아가고 싶은 곳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다.
사라진 것인지, 원래 없었던 것인지 이젠 그마저도 모르겠다.
어디로 가야 내 마음을 풀어놓고 쉴 수 있을까.
사랑받지 못할까,
인정받지 못할까 마음 졸이지 않은 채 그냥.
끝이 없는 고독과, 깊은 우울의 세상에서 나는
언제나 죽음이라는 것은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옳은 말들을 내게 늘어놓는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함,
그리고 더 나은 환경과 상황을 위한 무언가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그것들에서
나의 영혼의 깊은 만족을 얻지 못한다고 느낀다.
왜일까 계속 고민했다.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일까?
나에게 위로를,
그리고 무한의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느끼지만,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나의 오랜 습관 때문일까.
글쎄, 모르겠다.
곁에 두면 안 되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에도
나의 유일한 소망은 거룩이었던 것을..
그는 내가 속으로 나를 정죄할 때에도,
나의 순결함을 아셨고 기쁘게 여기셨다는 것을 안다.
나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나를,
매일 삶을 포기하고 싶어 했던 나를,
매일의 은혜로,
혹은 버틸 수 있는 하루치의 용기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지키셨다.
“나의 발은 그분의 길에 붙어서, 그 길을 따라가며 떠나지 않았지. 내가 그분의 명령을 떠나지 않았고, 그분의 말씀을 내가 매일 먹는 음식보다 귀하게 여겼어. 그렇지만 그분은 절대 주권자이시니 누가 그를 돌이킬 수 있을까? 그분은 자기 원하시는 일을 모두 하시질 않나? 그분은 날 위해 계획하신 것을 행하시며, 아직도 많은 계획들을 갖고 계실 거야. 그러니 내가 그분 앞에서 놀라고, 생각만으로도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하나님께서 나를 낙심하게 하시고, 전능자께서 나를 좌절하게 만드시니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나를 감싸고 있구나.”
(욥기 23:11-17)
내가 무언가를 해결해야 답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추이시고 아직 나타내지 않으셨기 때문에 일어나는 어려움이다. 라며 욥은 친구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가는 길을 아시지.
그분이 나를 시험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겠지(욥 23:10)
고된 마음들에 괴롭고
이해되지 않음에 항상 짓눌려버리는 나는,
긍정적이지 않은 나의 생각의 길,
감사함을 선택하지 못하며,
이미 허락하신 행복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 같은 작은 나를 보고, 스스로를 정죄하고 또 작아진다.
여전히 모르겠다.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지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겨우 살고 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매일 죽고 싶어 하던 나는,
이제 살아내겠다는 고백을 드린다.
스스로의 옳음, 실력.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일들을
타협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하신다.
그런 신실하신 하나님의 계획으로 오신 예수님은,
고통과 슬픔, 괴로움을 뛰어넘고 계획을 이루어내시지 않았다.
이 잔을 옮길 만하면 내게서 옮겨달라고
고통스러움을 그대로 느끼며 혹독한 원망으로 끝없이 기도하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5:7)
견딜 수 없어서 터져 나오는 울음, 통곡을.
성자인 예수님이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히브리서 5:8)
견딜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 결정권을 아버지께 올렸다.
“경외하심으로”
내 문제를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예수님의 통곡과 처절한 고백은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의 내용으로 바뀌었다.
욥도 자신의 삶으로 고백한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자신을 감싸고 있다고
고난으로 인하여 배우는 것은 결국, 인간의 한계.
나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도,
나로부터는 선한 것이 하나도 나올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순종은,
요구하는 대상에게 나를 억지로 복종시키는 정도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의 진정한 내용을
내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채워주심으로 넘기는 것.
인간의 최고의 경지를 포기하고,
신의 은혜가 허락하는 경지로 자신을 넘기는 것.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요구하는 존재로써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은혜와 인도하심에 의한 넘어섬의 경계선.
넘어와야만 한다. 넘어오려면 죽어야만 한다.
세 친구가 얘기하는 ‘옳음’
인간이 추구하는 종교의 극치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한계,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는 뚫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욥의 세 친구, 그리고 욥이 등장한다.
그들이 가진 한계를 깨우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욥이 하나님의 신실한 인도하심을 받아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게 한다.
세 친구와 얘기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도 해결이 안 되는,
그리고 그것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붙드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던 욥은, 그제서야 드디어 더 이상 자신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생각해야 하고 고민하는 것은 죽음보다 큰 것일 것이다.
언제나 일정하시고,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실 수 없는 분은,
나를 비명과 절망과 고난으로 부르시지만,
나의 존재가 그럴수록 세상의 것으로 만족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더욱 알게 된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태어나는 것보다 나은데 왜 살아야 합니까?
도대체 왜.
욥은 대답을 원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욥에게 하나님은 질문하신다.
“내가 창조할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욥이 절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욥의 고통은 여전하지만, 욥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았다.
비탄에 찬 질문은, 해결된 것은 없지만 해소되었다.
내 앞에 나타난 하나님이 계시기에.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도 내게 직접 하시는, 살아계신 분이시기에.
이유는 뭔지 모르겠지만, 복도 재앙도 주신 하나님이 계신다.
바로 내 앞에.
지금, 여기.
주님께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묻겠으니 너는 대답하여라'고 하셨지요?
주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 저는 주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욥기 42:4-5)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티끌과 재 위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통곡하시며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구했던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나는 돌아갈 곳이 있는 자였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여전하지만
오늘도 주의 얼굴을 뵈오니
이곳이 티끌과 재 위일지라도 천국입니다.
말은 무게를, 그리고 향기를 담는다고 믿습니다.
저는 마음의 결을 따라 글을 쓰고,
말로 다 담기지 않는 감정들은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제 안에 오래 머물던 조용한 마음 위에
소리를 얹고 글을 엮어, 한 편의 영상으로 나눕니다.
쓰고, 연주하고, 담아내는 모든 순간은
제 안에 머문 시간의 기록이자 작은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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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그리고 사랑.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들,
그리고 꿈꾸는 것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읽는 동안, 혹은 다 읽은 후에 음악도 함께 들어주신다면
조금 더 풍부하게 저의 색깔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소박하지만 고요한 향기가 나기를 바라며,
작은 위로와 따스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ㅡ
고요히 지나간 마음을, 글은 향기로 담고 음악은 숨결로 남겼습니다.
이 글과 이어진 작은 연주는 여기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