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그날
신혼여행 첫날밤, 해변 위로 검은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설마 진짜 태풍이 오는 건 아니겠지?’
농담처럼 흘려보냈던 그 말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2010년, 보라카이.
결혼식의 분주함이 끝나고, 생각지 못한 아빠의 눈물을 뒤로한 채 우리 둘만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창문 너머로 처음 보는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좁은 골목길을 달리는 오토바이, 알록달록한 간판, 낯선 언어들.
창밖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마음이 풀렸다.
‘이제 정말 결혼했구나, 우리가.’
그 생각에 웃음이 났다.
숙소 앞에는 푸른색이 아니라, 빛이 흐르는 바다가 있었다. 하늘빛과 바닷빛이 맞닿은 그 풍경 앞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첫날 저녁은 완벽했다.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고, 현지 음식을 먹으며 “이게 신혼여행이지” 하며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일 바람이 모든 것을 바꿔놓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다음 날 아침, 창밖의 파도 소리가 달라졌다.
창문을 여는 순간, 바람이 밀려들었다.
“태풍이 오고 있대요.”
리조트 직원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바람이 강해 해양 투어는 모두 취소됐다.
호핑 투어도, 선셋 투어도, 다.
우리는 창문 앞에 서서 허탈하게 바다를 바라봤다.
모래바람이 세게 불어 다리에 부딪힐 정도였다.
그래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제트스키 예약 장소로 향했다.
비가 내리고 파도가 센 바다에 우리 둘 뿐이었다.
“이런 날 탈 수 있을까요?” 조심스레 물었는데,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탈 수 있어요. 다만... 조심하세요.”
그 한마디에 우린 눈을 마주쳤고, 동시에 웃었다.
‘이왕 온 김에 해보자.’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비가 섞인 바닷물이 눈을 가렸고,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신랑이 운전대를 잡고, 나는 그의 뒤에 매달렸다.
“부표가 안 보여! 어디로 가야 돼?”
“나도 잘 안 보여! 눈이 따가워”
비명과 웃음이 뒤섞였다.
제트스키는 파도를 가르며 달렸고, 우리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졌다.
그 혼란 속에서도 이상하게 즐겁고 웃음이 났다.
비바람 속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게, 그땐 너무나 신기했다. 함께이기에 가능했다.
바람이 조금 가라앉은 날,
우리는 스킨스쿠버를 하러 갔다.
물속은 세상 밖과 달랐다.
햇살이 물 위로 떨어지며 반짝였고,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눈앞을 스쳤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을 수 없는 거리.
고요하고, 아름답고, 완벽했다.
혼란이 지나간 자리에는 평화가 남는다는 걸,
몸소 알았다.
그날 밤, 우리는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창밖엔 여전히 바람이 불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고요했다.
“10년 후에, 아이들과 다시 오자.”
그 약속을 하며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시간은 정말 빠르다.
그로부터 수년이 흘러, 지금 우리는 네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매일이 태풍 몰아치듯 바쁘고 정신없지만, 여전히 웃을 일이 많다.
가끔 TV에서 보라카이 바다가 나오면, 신랑과 동시에 말한다.
“우리, 진짜 다시 가자.”
태풍 속에서도 우리의 신혼은 빛났다.
그 바람과 비가, 오히려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결혼이란 결국, 끊임없이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도 서로를 붙잡는 일이라는 걸.
우리는 이미 한 번, 태풍 속에서 웃었던 사람들이니 어떤 힘든 일이 온다고 해도 헤쳐나갈 것이다.
언젠가 다시 그 바다를 보러 가겠지.
이번엔, 아이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