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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Apr 25. 2021

글을 쓰지 않은 건 내 탓이다

남 탓하지않기로 약속~

동생의 생일 선물로 사준 '인생의 숙제'라는 책은 몇 날 며칠 그대로 덩그러니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고요하고 적막한 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내가 먼저 읽겠다고 뺏어 왔다. 설레지 않는 내일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글쓰기를 시작한 주인공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많은데도, 나는 또 습관처럼 울어버렸다.





서른 즈음이 되어가며 나는 흑백사진이 되었다. 늘 텁텁한 기분에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뭐가 그리 힘든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작은 일에도 화가 나고, 그 화가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다른 사람에 머리 위로 쏟아내 버렸다. 갑작스레 구정물을 뒤집어쓴 초라한 그 사람의 모습에도 나는 또 다른 구정물을, 어쩔 땐 불쏘시개를, 어쩔 땐 바늘 몽둥이를 들이밀었다. 


그럼에도 나를 품어주는 사람들은 나에게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준다. 투명하게 일렁이는 바닷물이라든지, 햇살에 부딪혀 반짝이는 연둣빛 잎사귀이라든지.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는 사진을 찍어달라 조른다. 그러고는 잠들기 전에 한참을 들여다본다. 아무 걱정 없이 해맑게 웃고 있는 내가 너무 좋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로 빛나고 있는 내가 좋다. 그러다 문득 다시 눈물이 난다. 무엇이 나를 흑백으로 만들어버렸을까.






"현재의 나는 늙고 힘없는 나의 노예이다." - 인생의 숙제 中


글을 쓰지 않은 건 내 탓이 아니다. 지옥의 구렁텅이 같은 삶 속에서 필요했던 건 돈이었고, 내 꿈은 돈이 되지 않았다. 꿈을 꾸면 꿀수록 구렁텅이 속에 빨려 들어갔다. 그 속을 벗어나려면 악마의 입에 내 꿈을 미끼로 던져주고 나와야만 했다. 십여 년만에 찾은 안정 속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껴버렸다. 파도에 맞서서 부딪히는 것보다 그냥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게 훨씬 아프지 않다며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아프지 않을 뿐 즐겁지도, 설레지도 않는 쳇바퀴 같은 삶이 몇 년째 반복되고 찰나의 실수로 쳇바퀴에서 나동그라질 때면 하염없이 서럽고 눈물이 났다. 하지만 주저앉은 나를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았다. 괜찮다며 일으켜주고는 안락한 미래를 위해 힘내라며 등을 토닥였다. 일그러진 지금의 내 얼굴을 미래의 나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너는 나를 즐겁게 바라보고 있을까.




"시인이 꿈이었던 어린 나와 꿈을 잊었던 나의 거리는, 너무 멀다." - 인생의 숙제 中


남는 시간들을 SNS와 휴대폰 게임에 흘려보내며 글을 찾지 않았다. 그러다 꿈을 되찾은 사람들을 보면 심술이 나서는 울고 전부 남 탓이라며 소리 질렀다. 그럴 때마다 남자 친구는 "나중에 꼭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게 해 줄게."라는 말로 나를 안아줬다. 나는 그 말을 어떤 구원이나 마법 주문처럼 받아들였다. 정말 미래엔 내가 멋진 글을 쓰며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으니까 말이다. 


어쩌다 브런치를 켜면 두려웠다. 하루의 복잡한 심경을 글로 남겨두고 싶었는데, 하얀 바탕 위에 깜박이는 커서가 나를 재촉하는 것 같아 무서웠다. 여러 공모전에 야심 차게 도전했다가 맥없이 추락한 내 글들이 '네가 바로 애매한 재능충'이라며 나를 비난했다. 나는 그 잔소리가 듣기 싫어 이리저리 도망을 다녔다. 어제는 피곤했으니까, 오늘은 바쁘니까, 내일은……. 그렇게 글을 쓰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괜찮은 것에 내성이 생겼다. 나는 기다리기만 했다. 왜 이렇게 빨리 오지 않냐며, 왕자님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바보 같은 숲 속의 공주가 되었다.





나를 흑백으로 만든 것도, 노예로 만든 것도 전부 나 자신이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건 온전히 나의 의지이다. 그러니까 뭐라도 써야겠다.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사진 속의 나는 여전히 아름답게 웃고 있고, 미래의 나도 지금의 나를 보며 눈물 흘릴 것이며, 나는 멍청한 공주님이 아니니 말이다. 애매한 재능충이어도, 조회 수에 좌절하는 쫌생이여도 온전히 내 말을 들어주는 글을 사랑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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