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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Oct 30. 2020

요즘 베스트셀러는 다 누워있다

너도 나도 다 괜찮다, 괜찮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사고 싶었다. 유튜브를 보니 더 사고 싶었다. 그 책의 저자이자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말하는 예민한 사람의 특징이 전부 나를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나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었다는 그의 말에 나는 단숨에 구매를 결정했다. 그렇지만 장바구니에 덩그러니 놓인 책 한 권을 보자니 다른 책들도 담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냥 책이 사고 싶었다.)


도서 구입 사이트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이걸 담았다가 뺐다가를 반복했다. 화려한 광고 문구, 유명인의 추천사에 나는 거침없이 휘둘렸다. 이렇게 보니 이 책도 좋은 것 같고, 저렇게 보니 저 책은 더 좋은 것 같았다. 한 시간여를 낑낑대다 화딱지가 나서는 모든 창을 닫고 컴퓨터를 꺼버렸다. 서점에 가야겠다.


서점을 가려고 반차를 냈다. 오랜만의 서점 나들이에 봄 나들이 가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책장마다 알차게 들어찬 수백수천 권의 책들에 기분이 몹시 고조됐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서 검색 컴퓨터에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검색했다. 해당 구역을 향해 당당하게 전진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쭈뼛대며 직원 분에게 여쭤봤다.


"책을 찾고 싶은데요."

"책 제목이요?"

"그게...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요."


직원분은 단박에 '아, 고슴도치 그려진 책이요.' 하셨지만 나는 얼굴이 벌게졌다. 제목이 제목인 만큼 자기소개를 한 것 같아서였다. 책을 받아 들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책들을 탐색했다. 브런치를 하다 보니 에세이에 눈길이 갔다. 이 책 저 책을 꺼내고 뒤적거리다 나는 이내 빵 터졌다. '나는 ~게 살기로 했다'. 여러 책들이 가지각색으로 자신의 삶을 소개하고 있었다. 모두 비슷한데도 모두 베스트셀러인 걸 보면, 다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나 보다. 곧 머릿속에 얼마 전에 봤던 인터넷 유머글이 떠올랐다. '요즘 베스트셀러는 전부 자고 있다'던 그 글.


저 책들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단 1도 없습니다


우연인지 연출인지는 모르겠지만, 게시글 속 책 표지에는 정말 모두 누워있는 사람 투성이었다. 마치 매일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처럼. 그래도 막상 누워 있으면 아직 끝나지 않은 프로젝트와 검토하지 못한 문서들이 머릿속에서 일벌 떼처럼 왕왕거린다. 애써 벌들을 쫓아내고 복잡스러운 맘으로 억지로 버텨본다. 그래도 자꾸 두둥실 떠오르는 생각. '이대로 정말 괜찮나.' 생각은 모여들기를 좋아한다. 멈추지 않고 제 친구들을 불러내면 내 잠은 모두 달아나고 만다. 오늘은 휴일인데. 일어나 베개를 정돈하고 다시 누워봐도, 이미 무거워진 머리는 베개를 자꾸 푹푹 눌렀다.


그러다 만난 게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광고였다. (뒷 광고/앞 광고 아님, 관계자 아님) 내가 우울증도, 불안 장애도 아니라 그저 예민한 거라는 위안. 예민한 사람은 많으니 괜찮다는 증거. 내게 필요한 건 그거였다. 사색에 잠겼던 나는 다시 '누워있는' 책들을 바라봤다. 다들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다들 괜찮지 않은 삶일까 봐 걱정하고 있구나. 그 사실이 어딘가 모르게 위안이 되었다.


기업들은 우리가 늘 홀짝거리는 생수 제조사의 설립자가 실제로는 수많은 밤을 절치부심해야 했고, 발끈 화가 치밀어 올랐고, 자녀들과 멀어졌고, 울음을 터뜨렸고, 심지어 프랑스 플라스틱 공급자와 실망스러운 미팅을 한 뒤에 토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 '평온', 알랭 드 보통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은 다 괜찮은 것처럼 보인다. 정말 나만 빼고 다 멀쩡해 보였다. 멀쩡하다 못해 잘 살았다. 내 또래인 화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젊은 나이에 당차게 하고 싶은 일을 해내며, 빚을 다 갚았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대단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박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멋진 그가 좋아 <나 혼자 산다>에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챙겨봤다. 화사가 나온 편은 늘 재미있었다. 딱 한 편 빼고.


[출처] MBC 나 혼자 산다 캡처


<마리아>로 솔로 컴백을 준비하다 허리를 다친 화사는 소파 위에 누워서도 꼬물대며 안무를 연습했다. 언제나 당당하고 강인할 것 같던 그녀가 초조해하고 가족 이야기에 울음을 터뜨렸다.


"이른 나이에 취직하고, 이제 걱정 없겠네."

"난 네 삶이 부러워."

"당찬 모습이 너답지."


나를 포장했던 수많은 말들이 가슴을 때렸다. 그렇게 나는 화사와 함께 눈물을 훔쳤다.


다들 그렇게 산다. 괜찮지 않은 삶을 괜찮은 척 살아간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부장도 말 안 듣는 남편이 있고, 주식 부자 아저씨는 쓸쓸히 홀로 죽어갔다. 다들 괜찮은 척이 아니라 괜찮고 싶어 하고, 나만 이런 걸까 무서워한다. 그렇게 다들 누워 있는 책을 사고, 어떤 사람을 위한 책을 산다. 다들 그러니까, 내가 불안하다는 사실에 불안하지 않으려고 한다. 너도 나도 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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