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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Oct 24. 2020

발표하려고 교과서를 통째로 외웠어요

손을 들 용기를 얻었던 법

중학교에 가서도 나는 선생님 옆에 서지 못했다. 모르는 걸 당당하게 질문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선생님 곁에서 틀린 문제를 말 한마디 없이 다시 풀기만 했는데도 얼굴이 벌게지고 숨이 가빴다. 아는 문제였다가도 금방 모르는 문제가 되고는 했다. 15살이 되자 그런 내가 참 볼품없다고 느껴졌다. 


사회 선생님에게도 나의 부끄러움은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분명 무엇을 배웠는지 알았는데 입 밖으로 단 한 단어도 나오지 않았다. 달싹거리는 내 입술을 보던 사회 선생님은 뭔가 결심한 듯 반 전체에 선포했다.


"매 수업 시작 전에 3개의 질문을 할 겁니다. 한 학기 동안 발표 다섯 번을 채워야 수행평가 만점입니다."


발표가 어려운 내게는 사형 선고 같이 느껴졌다. 선생님 눈만 바라보는 범생이에게 수행평가 빵점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찾은 방법은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는 일이었다.


다음 사회 시간.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땀이 솟는 손을 교복 치마에 자꾸 닦았다. 그 사이 두 번의 기회가 다른 친구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오늘을 놓치면 어제 몇 시간 동안 외운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될 판이었다. 선생님의 말이 물음표로 끝나는 순간 나는 슬며시 손을 들었다. 


시선은 선생님 뒤의 칠판에 고정한 채로 교과서 내용을 줄줄 읊었다. 발표를 마치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았다. 겨드랑이는 이미 흥건했다. 선생님의 심사 결과를 들을 차례였다. 선생님이 웃었다. 그러고는 박수를 치셨다. 아이들도 '오오-'하며 반응했다. 뜨겁던 얼굴의 열기가 가라앉고 그 자리엔 뿌듯함이 가득 찼다. 


이후로도 사회교과서를 통째로 외웠다. 수행평가 만점은 물론이고, 사회 교과 전교 2등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내게 그보다 더 큰 걸 배웠다. 손을 들기 위해, 많은 아이들 앞에서 이야기하기 위해 나는 사회 교과서를 수십 시간 붙들고 있어야 했다. 크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나는 얼굴이 곧잘 빨개진다. 어쩔 수 없이 대학교에 가서도, 직장에 가서도 무언가를 수십 시간 붙들고 있는다. 나는 그렇게 용기를 얻는다.


외우는 자만이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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