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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Dec 05. 2021

첫째 딸로 산다는 건

내 마음은 이래

시작은 치약이었지. 엄지손톱만큼이나 남았을 치약을 네가 다 써버렸을 때 나도 모르게 꼭지가 돌았어. 치약을 사 오기엔 너무 귀찮은데. 나는 이걸 내일 아침까지 쓸 계획이었는데. 집안에서 너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너 진짜 이기적이다."


너는 어이가 없었을 테지. 고작 치약 가지고 짜증을 냈으니까. 네 말처럼 다시 사 오면 될 치약 가지고. 지금 다시 생각해도 정말 그건 내 잘못이 맞아. 근데 그러기 싫었어. 여태까지 네가 잘못했으니까. 너는 엄마 말도 잘 안 듣고, 네가 번 돈을 펑펑 다 쓰고 내 돈을 쓰면서도 미안해하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네 잘못이야.


"다시 사 오면 되잖아. 짜증나게."


엄마가 내 옆에 섰어. 항상 이럴 때면 내게 모스부호 같은 눈빛을 보내. 처음엔 좀 더듬거렸지만, 지금은 척하면 척이야. 의미는 늘 똑같았거든. '그만 이야기해.' 평소엔 입력이 잘 됐는데 오늘따라 내가 고장이 났나 봐. 말을 듣기 싫었어. 네가 치약을 사러 나가고도 계속 신호를 보내는 엄마가 미웠어. 몸이 바글바글 끓었어. 입술도 파르르 떨리고, 머리에선 김이 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유치하지만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해버렸어. 나도 조금 놀랐지.


"왜 나는 쟤한테 아무 말도 못 하게 해."


알아. 엄마는 다 큰 동생이 내게 대들거나 못된 짓을 할까 봐 나를 자제시키는 거야. 근데, 이미 너는 내게 못되게 이야기했고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바보가 되어버린 거야. 그래서 엄마한테도 화가 났어. 씩씩댔어.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비우려고 했어. 갑자기 마음이 샐쭉이더니 엄마는 잘못이 없다고 이야기했어.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거야.


"엄마, 엄마한테 소리친 건 미안해요. 그치만 정말 화가 났어요."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화가 났나 아님 속이 상했나? 걱정이 됐어. 엄마는 날 더러 나가라고 했어. 나쁘게 이야기한 건 아니었어. 내가 동생 때문에 스트레스받아하니까 나가래. 난 나가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어. 난 나가야 할 이유보다 나가지 않을 이유가 더 많았으니까. 그리고 네가 왔어. 엄마는 널 더러 이리 와 앉아보라 그랬어. 전쟁이 시작될 걸 알아서 싫었지만, 이번엔 잘해보고 싶었어.


"네가 나가. 누나는 안 나간대."


엄마는 늘 결론부터 이야기해. 그럼 너는 옛날이야기를 해. 나는 알아. 오늘만큼은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아냐. 오늘은 내가 잘못했어. 사소한 거 가지고 내가 짜증 낸 거야."


그치만 둘 다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어. 너는 엄마를, 엄마는 네 탓을 하는데 어쩐지 모두 내 탓을 하는 것만 같았어. 정말 나만 잘못한 것 같았어. 나는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울기만 했어.




너는 네 방에, 엄마는 엄마 방에서 서로를 미워하고 있어.


나는 내 방이 없어. 나는 주방에 오도카니 앉아 내가 잘못한 것들을 떠올리며 글을 써. 마치 죄인처럼. 그럴 때면 다시 나는 13살의 나로 돌아가. 엄마가 술에 취해있고, 네가 하얗게 질려 자주 쓰러지던 그때로.


네 말처럼 그때의 나는 짜증을 많이 냈어. 공부를 잘하고 싶었어. 공부를 잘해서 좋은 직장을 가지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어. 방은 하나인데 너랑 엄마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면 그게 그렇게 짜증이 났어. 나는 좋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데. 나도 놀고 싶은데. 그래서 조용하라고 외댔지.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면 끝이 날 줄 알았는데, 더 큰 허들이 많았어. 저것들을 다 넘으면 이제는 조용히 하라고 안 할 거야. 근데 이제는 계속 귓속이 시끄러운 거 있지.


너는 나랑 달랐어. 허들이 있으면 돌아갔어. 힘들면 주저앉기도 했고,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한 적도 많았어. 나는 그게 불안했어. 저렇게 하면 좋은 미래가 안 올 텐데. 그래서 뛰던 길을 돌아가서 네 등을 때렸어. 근데 네가 더 크게 앙앙 울고, 트랙을 벗어나버린 거야. 그때 토닥여줬어야 했을까.


너는 내가 선 트랙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어. 달리기를 하지 않고 띵가띵가 노래를 부르고, 엄마 말도 가끔 안 듣고, 내 달리기 우승 상금보다도 적은 돈으로 네 하고 싶은 걸 다했어. 그때부터였나 봐. 난 네가 미웠어.


그런데 나는 내 방이 없어. 50m 달리기든 마라톤이든 끝내도 난 아직 방이 없어. 네가 울며 누워있고, 엄마가 불편한 잠을 취하는 그 공간이 내겐 없어. 엄마와 네가 불편한 기색을 내뿜는 그 중간에서 지금 나는 글을 써. 그래서 이젠 정말 모르겠어. 네가 잘못한 건지, 내가 잘못한 건지 아님 아무도 잘못을 하지 않은 건지.


또 소나기처럼 지나갈 거야.

오늘 일은 이게 다니까. 오늘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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