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미안함을 느끼게 하는 엄마가 싫어
"나 오늘 저녁 약속 있댔잖아."
분명 어제저녁에 말해둔 것 같은데 엄마는 또 내게 전화를 한다. 언제 오냐고. 신데렐라도 12시까지 춤을 추는데, 나는 9시만 되면 발을 동동 구른다. 정확히는 9시가 다 되어갈 때쯤 부터지만. 이런 기색을 내비치는 내가 너무 창피하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 통금이 있냐라든지 한 번은 부모 말을 어겨봐야 자유로워진다는 둥 남의 속도 모르는 참견들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가방을 끌어안는다. 그럼 누군가는 먼저 가보라며 괜찮다고 말한다. '너희들이 안 괜찮으면 또 어쩔 건데'라며 괜한 시비를 입 안에 머금고 쿨한 척 택시를 잡는다.
엄마는 덩그러니 방에 담겨 있었다. 이제는 나가면 술을 먹고 들어오냐며 기분대로 모욕적인 말씀들을 던진다. 원래라면, 아니 그저 조용하고 싶은 나라면 그냥 삼켰을 말들이 요즘은 통 삼켜지질 않는다. 참아야 하는데 나가서 처먹은 술은 나로 하여금 핑퐁의 용기를 줬다.
"엄마도 저녁 약속 잡으면 되잖아."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할 때면 우는 버릇 탓에 횡설수설했지만 요지는 하나였다. 엄마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내가 싫어. 그 속에 담긴 나의 미운 말은 '내게 미안함을 느끼게 하는 엄마가 싫어'였다.
엄마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헌신'이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모두 다 그런 거라고 하기에 엄마는 더 특별했다. 수술을 받고 입원했을 때도 끼니를 거르게 하지 않았고, 내가 잃어버린 칭찬 쿠폰 수십 장을 길바닥에서 주워다 주며 몇 장은 못 찾았다며 미안해했고, 당신 옷은 오일장표여도 내 옷은 늘 아디다스였다. 자식과 관련된 일이라면 돈이든 몸이든 자존심이든 다 갈아버렸다.
나는 그 덕에 훌륭하게 자랐다. 남부끄럽지 않은 직장을 가지고, 맛있는 걸 먹을 때면 엄마 몫을 챙기고, 주말에는 엄마의 일을 돕는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남들은 전생에 부부였냐고 물을 정도로 바람직한 모녀였다.
문제는 내게만 좋은 일을 할 때 생겼다. 남부끄럽지 않은 직장, 함께 맛있는 걸 먹기, 주말에 일 돕기가 엄마와 나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만 저녁 약속은 내게만 좋은 일이었다. 엄마는 내가 없으면 저녁을 거르거나 김치랑 대충 먹거나를 선택했다. 엄마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게는 일종의 시위 같이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미안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엄마는 대답했다. 세탁소 아줌마는 얻어먹을 줄만 알지 베풀 줄 몰라 싫고, 양념집 아줌마는 필요할 때만 불러서 싫다고 했다. 그 외에도 싫은 사람들 투성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녁 약속을 잡냐며 아이처럼 펑펑 우는 엄마가 안쓰럽고, 또다시 엄마를 끌어안는 거 외에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지럽다.
내게만 좋은 일을 하는 내가 싫다가
내게만 좋은 일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찾다가
그 이유가 엄마일까 봐 미안하다가
내게 미안함을 느끼게 하는 엄마가 싫다가
결국은 엄마를 싫어하는 내가 다시 싫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