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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May 25. 2020

제주도 임대주택에 산다

한적하고 푸릇푸릇하고 고요하고

난 제주도에 산다. 그리고 임대주택에 산다. 열여섯 사춘기에겐 너무도 부끄러웠다. 앞길 창창한 내게 옥에 티 같았다. 그 둘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부단히 노력했다. 수학여행 때 촌년처럼 고개를 쳐들고서야 바라보던 그 빌딩 사이 어딘가에서 살고 싶었다. 강산이 변한 지금도 나는 아직 저 둘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 짐작하건대 제주도에 사는 청소년들 백 중 구십은 이 촌스런 섬을 떠나길 바랄 것이다. 큰 물에서 놀아야 큰 고기가 되니까. 나도 그랬다. 서울에 가면 길을 가다 서강준이나 박보검을 보는 일은 흔하고, 멋진 경력을 쌓아 커다란 빌딩에서 개미처럼 일하는 커리어우먼이 되어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내가 상상한 성공한 서울 여자


나의 서울 동경은 단 세 번의 나들이만에 와장창 깨졌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내게 서울은 '숨 막힘' 그 자체였다. 엄마는 남들은 발버둥 쳐도 힘들다던 '인 서울'을 짜잔 하고 성공시킨 딸의 뺨을 때리며 절대 안 된다 했다. 엄마를 향한 지독한 원망스러움이 얼떨떨한 감사함으로 바뀌는 게 너무 혼란스러웠다. 처음엔 내가 못 가진 것에 대한 합리화인지, 정말 내가 서울이 싫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두 번째부턴 확신이 들었다.


시끄러웠다. 차를 타면 차 지옥에 갇히고, 지하철을 타면 사람에 갇혔다. 저녁 시간 길을 걸으면 수없이 어깨를 부딪히고, 두 개뿐인 내 눈에게 백 개의 찬란한 불빛들이 아른거렸다. 낯섦이 주는 설렘이라기엔 너무 폭력적이었다.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도 서강준이나 박보검을 보긴 쉽지 않았고, 이미 나는 멋진(현실은 코찔찔이지만) 커리어우먼이다. 내겐 서울에 살 이유가 없었다.



제주도는 그렇다 쳐도, 임대주택은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 스스로 직장동료들에게 집 주소를 떳떳이 말하지 못했다. 내가 뭐라고 임대주택에 사는 모든 이들을 이렇다 저렇다 일반화할 순 없다. 그렇지만 음식쓰레기를 화단에 그냥 버린다든지, 술에 절어 구급차를 택시로 사용한다든지, 집 안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 화재경보기가 울리게 한다든지 등등... 내가 본 것만으로는 꽤나 비상식적인 사람들의 비중이 높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엔 없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내가 그런 사람들처럼 비칠까 두려웠다. 그럴듯한 아파트에 저렴한 임대료로 산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는데, 어느새 난방도 안 되는 단칸방보다 싫어져 버렸다. 동네에 유명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선다기에 얼른 분양 정보를 알아봤다. 제일 작은 게 약 18평이었는데 제일 인기 없는 층이 3억이었다. 모든 옵션 다 빼고. 빈 주머니를 토닥이면서도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 집이 맘에 안 드는 척 분양사무소를 빠져나왔다.


6천원짜리 아파트는 없나요? ' v '


터덜터덜 나의 부끄러운 임대 주택가를 걷는데, 하늘이 너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데 내 두 볼엔 물방울이 연속해 똥알똥알 흘렀다. 저 처자가 왜 저러나 하며 야자수가 파스스스 손을 흔들었다. 맑은 날 제주의 임대주택은 예뻤다. 누가 볼까 두려워 항상 개미만 보고 걷다 하늘을 보니, 예뻤다. 나만 몰랐지 사실은 한적하고, 푸릇푸릇하고, 고요했다. 완벽히 내가 사랑하는 제주를 담고 있었다.


매일 봐도 좋은 야자수


그래. 나 제주도 임대주택에 산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걸 견딜 만큼 사랑하는 제주니까. 언젠가는 집도 마음도 조금 더 고요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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