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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Jun 11. 2020

처음부터 아빠가 없었으면

앙금 져 가라앉은 일들 다시 꺼내기 - 중간

그래도 종종 낡은 파란색 트럭으로 학교에 태워다 줬다. 중간에 내가 싫어하는 아줌마가 같이 탔다. 오랜만에 아줌마 봐서 좋지 않냐고 묻는 아빠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나랑 놀러 갔을 때도 그런 얼굴은 안 보여줬는데. 서운했다. 엄마에게 속상했던 아침 일을 털어놨다. 오늘도 아빠는 집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잠든 줄 알았던 엄마는 아빠에게 전화로 욕을 했다. 내 탓인 것 같아 미안했다. 그냥 비밀로 할 걸.


방문 틈새로 거실 겸 주방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엄마가 가위를 들고 있다. 아빠는 내가 깬 줄 알았는지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날 것 같았는데, 나가서 말리고 싶었는데, 몸이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그게 다 눈으로 나왔다. 소리 내면 엄마 아빠가 나를 향해 덤벼들 것 같아 숨죽여 울었다. 얼른 해가 떴으면 좋겠다. 슬그머니 뒤로 돌아누워 동생 뺨에 손등을 올렸다. 새근새근 깨지 마라 우리 아기.


12살이 됐다. 엄마는 아빠랑 이혼할 거라 했다. 그러라 했다. 엄마가 힘든 건 싫었다. 이혼 기념 파티라도 하는 건지 노래주점에 동네 이모 삼촌들이 모였다. 누군가는 엄마를, 누군가는 아빠를 위로했다. 아빠가 울면서 노래를 부르길래 눈물을 닦아줬는데, 엄마가 싫어했다. 아빠가 술에 취해 길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래도 아빠니까 일으켜줘야지. 엄마에게 도와달라고 했는데, 분명 들렸을 텐데, 그냥 가버렸다.


다음 해, 동생 생일 며칠 전에 아빠가 없어졌다. 나한테 잘 있으라는 말도 안 했으면서. 그래도 괜찮았다. 여전히 엄마를 사이에 두고 자고, 전학도 가지 않았다. 조금 힘든 건 엄마가 저녁 약속이 있을 때였다. 자다 눈을 떴는데 엄마가 없으면, 그대로 아침이 될까 봐 무서웠다. 머리를 묶어줄 사람도 없고, 아침을 차려줄 사람도 없을까 봐. 그런 날이면 헐레벌떡 맨발로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엄마를 불렀다.


엄마의 저녁 약속이 줄어들 때쯤 나는 중학교에 갔다. 자기소개서에 아빠에 대한 정보를 적는 칸이 있길래 이름 빼고는 다 모른다고 적었다. 주소도, 연락처도, 사실은 나이도 정말 모르니까. 마치 처음부터 아빠가 없없던 기분이었다. 종례 시간 담임선생님이 무척이나 단호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혼냈다.


"아무리 아빠랑 따로 살아도 다 모른다고 적으면 되니? 그 사람은 돌려줄 테니까 다시 적어와."


누군가는 얼굴이 벌게지고 호흡이 가빴다. 모두 그 누군가를 눈치챈 것만 같아 집에 돌아가자마자 엄마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아빠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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