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보일 Jun 13. 2020

예, 제가 보호자입니다

앙금 져 가라앉은 일들 다시 꺼내기 - 끝

17살 여름, 엄마가 아팠다. 안 아픈 날이 없었지만, 그만큼 아픈 날도 없었던 것 같다. 난생처음 대학 병원에 갔다. 모르긴 몰라도, 대학 병원은 심상치 않은 곳이란 느낌 정도는 있었다. 푹 꺼진 두 볼로 해골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장난을 치는 엄마가 미웠다. 차라리 아프면 아프다 말하면 좋을 걸.


자궁을 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유착 어쩌고 했는데, 나는 이미 패닉 상태에 빠졌다. 엄마는 누누이 여자에게 자궁이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기라고 강조해왔어서 그런지 곧장 눈앞이 흐려졌다. 어른스럽게 행동해야겠다던 나의 다짐은 매운 코끝을 따라 사라졌다.


이것저것 복잡한 입원 절차와 검사들을 마치고 엄마가 병실 침대에 누웠다. 삼일 밤낮이 지나도 누군가 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6인실의 5인도, 간호사들도 보호자가 없다는 걸 눈치챘으리라. 엄마를 수술실에 들여보내고는 6살 때 찾았던 모든 신을 다시 불러다가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오랜만이죠? 이번엔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 제발요.


엄마보다 늦게 들어간 환자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간호사가 엄마의 보호자를 찾았다. 나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간호사를 바라봤다. 내가 보호자라는 말에 그의 눈빛도 나만큼이나 흔들렸다. 이내 작은 날숨을 쉬고는 나이가 많은 편이라 마취에서 늦게 깨는 것 같다고 했다.


사경을 헤매며 나오는 엄마침대를 따라 걸으며, 보호자답게 행동하기로 했다. 엄마의 마른 혓바닥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고, 자꾸 말을 걸어 엄마를 깨웠다. 엄마가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미안함을 잊을 만큼 간호사를 불렀다.  번은 아침에 울린 알람에다가 여보세요를 해서는 다른 5인방이 나를 측은하게 바라볼 정도였다.


성장기인 동생에게 계속 삼각김밥만 먹일 순 없었다. 아빠를 만나야 했다. 아빠는 날 아주 반가워했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 내 이름으로 든 적금 통장 비밀번호도 알려줬다. 잠깐은, 아주 잠깐은 순간의 영원함을 바랐다. 엄마와 재결합을 바라는 아빠의 말이 아주 달콤히 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의 환상은 그의 말 한마디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엄마랑 아빠는 널 원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생겨서~"


뒤에 말은 들리지 않았다. 만삭이었던 배를 지키느라 등에 멍이 들도록 맞았던 엄마를 자신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화났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나를 통해 뭔가를 얻어내려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이제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걸로는 모자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를 해주고 싶었다.


여느 하루와 같이 그를 만나 장을 봤다. 노트북도 필요하고, 프린터기도 필요하고, 집에 티비도 오래되어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그를 만난 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사달라고 부탁한 적 없었기에 그는 흔쾌히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밝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집에 돌아와 문자를 남겼다.


'내가 당신을 만났던 건 돈이라도 달라는 거였어. 양육비는 바라지 않아도 생활비 몇 푼은 줄 줄 알았지. 당신 같은 건 나한테 이제 필요 없어.'


몇 통의 전화와 문자가 왔지만, 읽지도 않고 삭제했다. 집 전화 수화기 너머로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그 모양이냐고 죄 없는 엄마에게 따져 묻는 그가 참 멍청해 보였다.




최근에 차를 알아보려고 엄마와 자동차 매장에 갔다. 엄마는 내 동의도 없이 거짓말을 시작했다. 너무 비싼 차를 사면 애아빠가 싫어할 거라며 말이다. 남편분이 운전 경력이 얼마나 되었느냐고, 견적을 남편분 걸로 뽑아보자며 성함을 말해달라는 요구에 엄마의 안면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거짓말을 들켜버린 엄마의 두 눈이 참 애달팠다.


여자 둘이 자동차를 보러 가면 무시당할 거라던 엄마의 안쓰러운 마음은 쓰라림이 되어 고스란히 내 가슴에 닿았다. 사실은 따로 산다며 또 다른 거짓말로 정적을 깨는 엄마에게 나는 아직도 충분한 보호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참 아프다.

작가의 이전글 처음부터 아빠가 없었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