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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May 03. 2020

나의 불행이 당신의 다행이 되어도 좋다

위안이 어려운 당신에게


잘한다 잘한다 해줘도 모자랄 판에 못난 나로 글을 시작하려니 조금 암울하다. 그래도 나는 못날 때 글을 잘 쓴다.




언젠가 한번은 화장실에서 오열하다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와. 산타가 왜 우는 사람한테 선물 안 주는지 알았다. 우는 나는 정말 못났다. 그래서 울다가 웃은 적도 있다. (너무 슬플 땐 발바닥에 대고 여보세요하지 말고 거울을 보자) 어쨌거나 나는 못난 나가 좋다.(갑자기?) 못난 내 마음 한 구석이 나를 글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1살 코딱지 시절에도 엄마아빠가 싸운 게 어디 자랑거리는 아니란 걸 알아서는, 엄마가 사준 조그만 공책에 적기 시작했다. 오늘은 안 싸우면 좋겠다, 왜 나는 이런 집에 태어났을까, 나는 엄마아빠한테 짐이다 어쩌구 저쩌구.


이 무렵에 벌써 내 이야기가 불편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내 불행한 과거는 다른 사람에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처음엔 그게 서러웠다.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 산 게 아닌데, 왜 나를 길에 내뱉어진 가래침처럼 보는지 알 수 없었고 미웠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경우도 봤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 하면 입을 막거나 화제를 돌리거나. 그런 사람에겐 마음의 거리를 두게 됐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을 수록 그런 사람이 많아졌다. 그걸 가만히 지켜본 것만은 아니다. 조금만 짬을 내서 왜 불편할까하고 그 사람 입장에 서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참 역설적이게도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에서 다행을 찾으면서도, 자신이 덜 힘들다는 건 쉽게 용납하기 힘들다. 세상에서 스스로가 제일 힘든 건 불변의 진리인데 나처럼 불행 겨루기를 하자면, "나는 너무 힘든데, 네가 더 힘드네?"하고 마음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다들 잘 알다시피 남이 더 힘들다고 내가 안 힘든 것도 아니고, 희망이 있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이 멋진 말은 소설 종의 기원에 나온다.) 요약하자면, 나보다 더 큰 불행을 멀리서 보고 싶은 것이지, 가까이 두고 내 불행의 가치를 깎아버리고 싶진 않은 것이다.


그럼 나는 왜 자꾸 '그런' 이야기하려고 하고 '그런' 이야기로 글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내 삶의 위로를 얻기 위해서라고 답하겠다. 예전엔 곰팡이가 드글드글하고 보일러도 제대로 되지 않는 단칸방에 살았지만, 지금은 빨래도 잘 마르고 보일러 안 틀어도 안 추운 작고 소중한 아파트에 산다. 예전엔 단돈 5만원이 없어서 공부 못할까 걱정했지만, 지금은 5만원짜리 화장품도 큰 맘 먹고 살 수 있다. 남들 눈엔 평균보다 아래일지 몰라도 나는 계속 올라가고 있다. (아래니 올라가니에서 뭐 계급 어쩌구 잔소리하면 틀니 압수,  삶의 질이 올라갔다로 해석하기, 각자의 삶은 수평선이네 어쩌구 하면 임플란트도 압수)


못난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각자는 스스로가 가장 힘들다는 걸 받아들이면, 당신은 힘든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




예전엔 예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런 글을 못 쓴다고 생각했는데.

안 쓰는게 아니라 못 쓰는 게 맞다 !

찌질하고 콧물나는 글이 내 글이다. 힘들 때 글 쓰는 버릇해서 그렇다.

누군가 혹시 내 글을 본다면, 내 불행이 당신의 다행으로 비교군이 되어도 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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