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바람 든 풍선처럼 마음이 부유하는 때가 있다. 명절 연휴와 나의 생일이다. 엄마의 기일은 차라리 슬픔과 우울감에 젖어 오히려 묘한 안정감을 선사하지만, 누구에게도 슬픔을 드러낼 수 없는 명절과 생일엔 마음이 갈 곳을 잃는다.
집 안에 홀로 박혀 있으면 처량할 것이 뻔했고, 그렇다고 번잡스러운 귀경길을 피해 해외로 여행을 떠나기엔 경제적인 부담도 컸다. 작년과 같이 올해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다복이(키우는 강아지 이름이다) 짐까지 꾸려서 차에 올라탔다.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이리저리 지도를 살펴 국도를 달려볼까 궁리를 하거나, 휴게소에 들러 호두과자를 한 봉지 사 먹는 내 모습은 마치 누군가의 흉내를 내고 있는 리플리 증후군 환자 같았다.
정안 IC를 지나면 세종시 초입에 엄마가 잠들어 있는 납골당이 있다. 엄마를 잃고 2년 정도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이 납골당을 찾았다. 그나마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곳은 엄마의 곁이었다. 한 뼘씩 자리를 찾아가면서 납골당을 찾는 날이 줄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스산한 날이면 엄마의 흔적을 찾아 이곳에 온다.
명절 연휴에 부득부득 차를 몰아 세종을 찾는 나를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찾아오지 않는다고 서운할 부모님이 계신 것도 아니면서 굳이 번잡한 귀경길 운전을 감행하는 이유를 묻곤 했다. 식상한 질문들에 나는 매번 변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알싸하게 퍼지는 박하 향처럼 서늘한 마음을 가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달력에 빨간 숫자가 즐비한 달이면, 도망치듯 비행기를 타고 떠나던 때가 있었다. 스산함을 피해 간 곳에서도 내내 마음은 서성였다. 착륙하는 비행기가 활주로에 바퀴를 갈며 굉음을 낼 때마다 나는 굳이 돌아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대안이 없었기에 부랴부랴 짐을 찾아 공항을 빠져나왔다. 가족의 부재는 내게 상실보다 큰 구멍이었다.
마음은 때마다 소속감을 잃고 부유한다. 명절마다 외갓집 어른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더라도 내 가족의 부재를 실감하는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오기 마련이고, 홀로 유영하는 도시의 삶은 찰나마다 나를 적막 속에 버려둔다. 상실은 극복하는 것일까. 아니다. 상실은 수긍하고 감내하는 것이다. 무소속의 공허함과 외로움을 쓰윽 지나치는 것이 성숙한 것이라고 나를 설득하는 일. 비겁한 합리화만이 부유하는 마음에 숨을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