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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복 Jun 20. 2020

글을 짓는 밤

밤을 쓰는 마음

    

글자를 배운 날부터 시작된 끄적임은 운명 이었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무엇이든 끄적이고 적어대는 아이였다. 친구들은 내게 예쁜 메모장을 생일 선물로 주기도 했고, 어떤 이는 아끼는 샤프를 졸업선물로 건네기도 했다. 유독 말이 없고 외로웠던 나는 사춘기를 주로 책상에 코를 박고 무언가를 끄적이면서 보냈다.  

   

캠퍼스를 누비던 시절에도 같았다. 방학이면 온종일 방구석에 처박혀서 책을 읽고 비디오가게에서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빌려와서 줄기차게 돌려보고, 내가 본 것들을 또 끄적였다. 쏟아붓는 감정을 솜뭉치를 뭉쳐놓은 것처럼 싸이월드나 티스토리 같은 포털사이트를 이용해서 숨겨 놓았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애써 들키고 싶은 마음에 서성였다.     


집 앞 놀이터에서 미처 단단해지지 못한 마음을 달래며 매일 눈물을 쏟던 사회 초년생 때에도 그랬다. 상사 몰래 눈치를 보며 점심시간마다 타이핑을 쳐댔고, 그렇게 낮에 쏟아놓은 것들을 주섬 주섬 모아 잠들기 직전에 다시 손보았다. 거창한 글솜씨가 아니었음에도 나는 내 글을 읽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하루동안 촘촘하게 수 놓아진 내 감정을 읽어나가는 것 만으로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명치 끝에 무언가 얹힌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일 년을 보냈다.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은 시체 같았다. 뜬 눈으로 아침을 맞는 날이 많아졌다. 짙게 어둠이 내려앉는 날이면 노트북을 켰다. 허연 지면 위로 껌뻑이는 커서를 멍청하게 바라보다 힘 없이 고개를 돌리던 날들이 많았다. 퇴적된 권태는 나를 글모임에 밀어 넣었고, 일면식도 없던 이들 앞에서 억지로 글을 개워냈다. 그렇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로의 마음을 각자의 목소리로 옅보기를 며칠, 어느 새벽 알딸딸한 취기를 빌어 단숨에 토해낸 시 한편이 신호탄이 되었다.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온전히 ‘나’로서 세상 앞에 선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누군가에게 내 글이 읽힌다는 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타인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작은 노트북에 몇 년째 쌓여있는 글들을 숙성한 김치를 꺼내듯 하나씩 내어놓는 이유도 낯뜨거움과 두려움에 있다.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면, 나는 자꾸 밤을 깎아 글을 짓는다.     


고요와 적막은 다르다. 고독과 외로움도 다르다. 밤은 내게 외로움과 적막의 개념 이었지만, 글을 짓고 내가 지은 것들을 쟁여두면서 밤은 내게 고독과 고요를 선물했다. 더 이상 나는 짙은 밤 문 밖을 배회하는 마음으로 새지 않는다. 찾아온 고독을 벗 삼아 온 마음을 다해 글을 짓는다. 밤을 쓰는 마음은 하얀 쌀밥을 짓는 아궁이처럼 은근히 안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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