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개인의 사회가 찾아오기를 바라며
인간이란 무엇이고 사회란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정말 살아가는 데 불필요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우리 삶의 구동력이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내 어린 시절을 온전히 기억해 낼 수 있기 시작한 다섯 살 때쯤, 모친은 내게 종종 ‘네가 언니니까 동생을 잘 돌봐줘야 해’ 혹은 ‘네가 동생이니까 언니 말을 잘 들어야 해’라는 말을 하셨다. 내가 세 딸 중 둘째여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왜 언니는 이해심이 넓어야 하고 동생은 고분고분해야 하지?’라는 의문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언니는 동생의 것을 뺏거나 짜증 부리면 안 되는 건가? 뭔가 이상했다. 일곱 살에는 구몬 학습지나 피아노 강습을 시작하면서 ‘너도 이제 초등학생이 되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 혹은 ‘사람은 한 가지 악기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말들을 듣기 시작했다. 아니 왜 초등학생이 되면 공부를 해야 하는 거지, 사람이 꼭 악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하나? 난 귀로 듣기만 하는 게 더 좋은데. 음악은 예술가들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정식적인 학생이 되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라거나 ‘연애나 취미생활은 대학생이 되어서 해라’,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 할래?’ 등 재밌지도 않은 농담만 귀에 박히게 들었다. 그놈의 대학이 뭐라고.
그렇다고 대학생이 된 지금은 달라졌는가? 아니, 오히려 ‘요즘 대학생들은 1학년부터 학점 관리를 잘해야 한다’, ‘최대한 빨리 졸업해서 취업하는 게 답이다’, ‘대외활동, 공모전, 봉사활동, 스펙도 전부 다 챙겨야 한다’ 등 학점-취업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조언 아닌 조언들이 줄을 잇더라. 더 기가 차는 건 조언들이 예전처럼 ‘공부‘에만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학생이면 배낭여행도 다녀와야지’, ‘연애도 해 본 사람이 결혼도 잘한다’ 등 ‘놀기’에도 치중해야 한다더라. 대체 몸이 몇 개여야 하는 건지.
나는 이제서야 이런 조언들은 평생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취업하라고, 더 지나면 결혼하라고, 더 지나면 아이 낳으라고, 더 지나면 자식 교육 제대로 하라고, 더 지나면 노후 대비하라고… 더 지나면 호상 조언까지 할 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억울하다. 나는 평생 누군가에게 무엇을 강요한 적이 없었으니까. 누군가가 가정주부라고 살림에만 치중하라고 얘기한 적이 없고, 누군가가 사회인이라고 본업에 집중하고 저축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학생이라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왜 타인들은 내게 길이가 제각기 다른 잣대들을 들이미는 걸까.
내게 이런저런 불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보면 그 근간에는 ‘사회가 그걸 요구하잖아, 사회가 그걸 용납하지 않아’라는 말이 깔려 있다. 사회가 언제 ‘이러이러한 자격 요건들을 충족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학업, 음악, 이해심 등 여러 요건들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버러지 같은 삶을 살며 근근이 생을 연명하고 있다는 걸까?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동정은 최악의 감정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동정은 상대가 자신보다 하위에 있다는 전제조건 하에 나오는 치졸한 우월의식이라면서 말이다. 우리는 어떤 자격으로 타인의 삶을 평가하고, 감히 그의 삶을 행복하다-행복하지 않다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이런 잣대를 들이미는 타인들의 속내가 정말 동정 어린 시선이나 조언이었을까, 아니면 자기 위로의 일환이었을까? 어쩌면 타인들이 말하는 사회는 바로 ‘개인’이 아니었을까? 누구나 각자가 지닌 색안경을 끼고 타인을 바라보기 마련이니. 사회는 대중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을 뿐, 개개인이 말하는 사회는 개인의 성향이 짙게 반영된 산물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는 제각각 다른 사람이다. 외양도, 내면도, 각자 놓인 상황도, 성장 배경도,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도 다르다. 소위 그릇이라는 것도 다르고, 각자가 지닌 내면의 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짊어질 수 있는 무게와 타인이 짊어질 수 있는 무게가 확연히 다르니, 타인이 나보다 가벼운 짐을 지고 있다고 타박할 수 없으며 타인이 나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해서 동정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비교하지도 말아야 하고, 누군가에게 비교당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 사회가, 그런 개인들의 사회가 찾아올 수 있기를.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 중인 2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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