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징그러운 내 담석
이어지는 이야기
의사가 쥐어 준 담석이 담긴 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담석은 위내시경 때 종종 보았던 역류한 쓸개즙의 진초록색 진물로 버무려져 있었다. 쓸개즙은 고등학생 때부터 종종 역류했으니 그때부터 몸이 신호를 보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서재 한구석을 채우고 있는 베르베르가 건강한 육체에만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그랬는데. 그래서 내가 이렇게 건강하지 못했었나. 몸과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당연한 순리처럼 모든 것의 균열로 이어진다. 그 균열을 견디는 것은, 아니 벌어진 틈을 바라보는 것도 꽤 괴로운 일이다.
다시 담석으로 눈을 돌린다. 저 초록빛 진액을 벗겨내면 본연의 색을 볼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하지만 이 통을 열고 담석을 꺼내 물티슈 따위로 닦아낼 용기 따위 생기지 않는다. 뚜껑을 돌리는 순간 어떤 향기가 풍길지 예측할 수 없다. 담즙에서는 좋은 향이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편견 없이 살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에게 마저 편견이 가득 담긴 시선을 던진다. 이럴 때는 아포가토를 만들겠다며 아이스크림에 더치커피를 붓고 있는 동생에게 ‘그건 액젓이니?’라고 물어오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저렇게 편견 없이 살아야 하는데 말이지.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맞이한 휴식이 좋았다. 비록 수술한 부위의 통증은 있었지만, 종일 누워있으면서 양심의 가책이나 마음의 불편함 따위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무엇도 내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다지 생산성은 없지만 매일 해야만 했던 일들이 한순간에 사라졌고, 그 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생산적인 일을 한 건 아니다. 병원에서 침대에 누워 시체처럼 보내는 나날이 고역처럼 느껴질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생각보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은총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짧은 클립이 아닌 이상 영상물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기도 하고. 이때를 틈타 감수성이나 영감 따위라도 채워뒀으면 좋았을 텐데. 고작 한 거라곤 멍 때리고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거나, 담석 통을 만지작거리거나, 모친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밥을 기다린 것뿐이다.
조금 살만해지니 그제야 나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이 하나둘 기억나기 시작한다. 상처가 최대한 남지 않도록 조심했다며 수술은 잘 끝났다고 말하던 의사의 모습이,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항생제를 혈관이 터지도록 뻑뻑이 밀어 넣던 간호사의 모습이, 덜 깬 수면 마취와 불타는 고통 사이에서 헤매는 내 손을 잡고 뭐라 중얼거리던 모친의 모습이. 그때 모친이 뭐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이 말 만큼은 선명히 기억난다. ‘응, 많이 아파? 괜찮아. 이 고통을 기억해놨다가 글로 써.’ 아니 대체 아파 죽겠는데 이 고통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그 기억만큼은 선명하네. 뭐, 어쩌다보니 고통을 글로 쓰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고통이 좀 줄어든 이후 갑작스럽게 휴재를 때린 연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물론 고민을 시작했다고 그럴듯한 답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늘 그렇듯 꼬리에 꼬리만 무는 고민을 이어갔다. 대체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수술이야 나만 새롭고 놀라운 일이고, 고통스러움에 대해 논할수록 연재원고가 점점 더 어두워지는 느낌만 강해지는 걸. 사람들은 밝고 긍정적인 걸 좋아한다는데, 매번 월간 연재를 시작하면서 ‘밝고 희망찬’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면서 매번 상반된 분위기의 글만 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고민만 거듭하다 깜빡 잠이 든다.
모두가 잠든 새벽, 수술 부위의 통증과 열감으로 반갑지 않게 눈을 떴다. 한 번 깬 잠은 제대로 도망간 모양인지, 한참을 뒤척이면서 침대를 세웠다가 눕히기를 반복한다. 그 사이 4인실에는 한 분이 더 들어와 세 명이 되었기에 소음에 좀 더 유의해야 한다. 저소음 선풍기를 1단으로 켜서 배를 향해 얹어 두고 다시 고민을 이어간다. 이 상황에서 무엇에 관해 어떤 생각을 담아내야 할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정말 쓸 말이 많아서 글을 썼는데, 요즘은 글을 쓰기 위해서 쓸 말을 찾아내는 듯한 불쾌한 기분이 든다. 불쾌함이 따라오는 이유는 당연히 그게 사실인지라 내가 찔리기 때문이겠지.
한참을 뒤척이다 이렇게 한심할 수 없다며 자책을 시작한다. 진정으로 글을 사랑한다면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배를 쥐어 잡고 글을 쓰거나 하다못해 글감이라도 정리해뒀겠지. 진정으로 책을 사랑한다면 응급실로 향하는 가방 안에 아이패드가 아닌 손에 잡히는 책 한 권을 욱여넣었겠지. 면회 온다는 가족에게 포카리스웨트 따위를 부탁할 게 아니라, 헤르만 헤세의 책 한 권을 챙겨와 달라고 부탁했겠지. 어디 나가서 작가 지망생이라는 말을 할 자격도 없는 게 아닐까. 남들은 이것저것 다 잘 해내는 것 같은데 왜 나는 끈기 있게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걸까. 담낭을 떼어내면서 내 열정이나 의지도 같이 떼어버린 건 아닐 텐데.
가방 한구석에 쳐박아뒀던 담석 통을 다시 꺼내 든다. 공기에 노출되어서 그런지, 기분 탓인지 크기가 조금 줄어든 것 같다. 뚜껑을 열어볼까 고민하다 겨우 위에 저장해 둔 미음마저 내보내고 싶지 않아 그만두기로 한다. 저 진한 코딱지 같은 무생명체가 시비를 걸어온다. 못하는 건 빨리 포기하는 게 상책이라고, 자신이 없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너는 애초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였다고. 저게 나한테 말을 걸어올 리 없는데. 역시 잠을 덜 잔 모양이다. 통을 집어넣으려다 겉에 붙어있는 ‘황민서님 stone’이라는 스티커가 눈에 들어온다. 기분 나쁘게 비꼬는 게 수준급인 걸 보니 내 몸에서 나온 새끼 맞구나 싶어 웃음이 나온다. 저 담석이 예쁘게 보이는 날이 온다면 나는 나를 예쁘게 마주할 수 있게 될까.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했던 20년 8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올리는 이유는 귀찮음이 의지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 다른 원고를 읽어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붓한 공간에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 브런치에 올리는 모든 이미지는 직접 구매하여 라이선스를 부여받은 이미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