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일하는 곳은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오래된 유물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곳이다. 필자는 전시유물을 선별할 때마다 어떤 유물을 고를까를 고민하게 된다. 금년에는 토기 특별전을 개최하면서 이 전시가 무엇을 보여 주고자 하고, 무슨 의미가 있는 전시인가를 지금도 되새김질하고 있다. 과연 토기를 통해 한국인의 미의식과 한국미의 원형을 엿볼수 있는가를 말이다.
창작의 산물인 예술품은 과거의 유산과 작품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방과 재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신만의 특징을 차별화해 보여 주는 세계가 예술의 세계이다. 토기는 생활용품인 동시에 그 시대의 미의식을 엿볼 수 있는 예술품이다.
토기의 역사는 1만년을 넘는다. 최고(最古)의 토기로 알려진 제주 고산리 토기(기원전 8,000년전) 이후로 토기는 계속 발전해 옹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장독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 생활속에 녹아 들어온 토기는 한국미의 원형(原形)이자 정수(精髓)라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살아서는 다산과 풍요를 바라고, 죽어서는 내세의 평안을 원한다. 복받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민족성은 현세의 복을 더 좋아한다. 이런 인간의 욕망이 투영되고 투사되어 각종 토기로 탄생한다. 조물주가 인간을 만든 토기장이라고 하지만, 사실 인간이야말로 토기를 빚는 유일의 토기장이이다.
토기장이는 인간사회의 염원을 담아 동물들이 나오는 토우장식의 토기에 다산과 풍요의 정신 세계를 담는다. 배(선박)와 수레바퀴, 새와 말 모양의 토기를 빚어 내세의 평안을 기원한다. 단순해 보이는 토기야말로 고도의 정신을 보여 주는 추상의 세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단순화와 추상화(抽象化)가 요청된다. 토기가 현대예술의 추상표현과 접맥이 되는 지점이 그 점이다. 서양예술에서만 방법론을 찾지 말고 우리의 전통속에서 현대예술의 나아갈 방향을 찾아 보는게 우리에게는 더 낫지 않을까 한다.
토기는 생활용품에서 출발하여 예술품으로 진화해 왔다. 청자·백자는 흙으로 빚어 유약을 바르고 문양을 넣었을 뿐 토기의 연장선상으로 그 뿌리는 토기이다. 청자는 대부분 수천년간 이어져 온 토기의 기형(器形)으로부터 유래한다. 멋진 토기의 모양에 유약을 발라 구운 게 청자이다. 청자매병은 잘 알지만 그 똑같은 모습의 토기매병이 있다는 것은 잘 모른다. 그런데 그 둘은 크기와 형태가 같다. 잿물유약을 발라 한국인이 좋아하는 문양(연화문, 국화문, 인화문 등)을 그리고 고온에서 구운 게 청자매병이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국보지만 토기매병 역시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
토기야말로 한국미의 원형을 담고 있는 보물창고이다. 당대의 시대성을 시대마다 담고 있는 동시에 도공(陶工)의 고유한 정신세계가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美)는 한·중·일(韓中日)의 (美)를 비교함으로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을 가보면 우리와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을 느낄 수 있다. 필자가 여기서 단정적으로 우리의 미가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는 없다. 그건 실례이다. 과거와 달리 각 개인이 주인공인 오늘날은 각자 문제를 제기하고 자기만의 답을 찾아내는 시대이다. 그곳엔 우열이 없다. 취향과 경험, 생각과 지식에 따라서 해석은 다양하게 열려 있다. 필자의 소박한 견해로는 “기교를 넘어선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게 한국의 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토기 뿐만 아니라 3층석탑의 단순함, 돌장승의 정다운 미소, 이도다완이라 일본에서 불리우는 조선막사발의 소박함 등 우리 생활과 삶의 도처에 우리의 미의식이 깃든 작품들이 즐비하다. 예술이 따로 존재하는게 아니라 우리의 생활속에 예술은 늘 함께 한다. 그러므로 삶이야말로 예술이다. 예술가의 삶은 그가 빚은 작품 아닌가. 그 속에 우리의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삶을 떠난 예술은 없다. 우리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한다. 고난어린 삶속에도 예술은 존재한다. 고난의 삶이야말로 예술로 승화한다.
곧 추석이 다가온다. 멀리 해외로 가든, 가까이 국내 여행을 가든, 아니면 집에서 머물든 박물관·미술관에 들러 보길 권한다. 그곳에서 한국의 미를 발견해 보길. 이 가을날에.
검단선사박물관- 흙과 불의 조화, 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