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을 보는 용기
필자는 요즘 박물관에서 토기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몇 달전 전시할 유물을 고를 때의 일이다.
“이 토기는 입술이 찌그러졌는데 전시에서 빼는 게 어때요?”
“왜요? 저는 더 좋은 것 같은데요. 다른 것은 다 정상적인 모습이지만 이건 특이한 모습이잖아요. 보는 사람에게 웃음을 줘요.”
토기 중 신라토기 한 점이 묘하게 웃고 있었다.
“이건 가마에서 구울 때 찌그러진건데 그 원인은 잘못 빚어서에요. 그래서 이런 모습이 된 거에요. 불량품이죠.”
“이게 불량품이라면 깨어버렸겠죠. 이건 도공이 어떤 의도와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웃는 모습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어요. 전 이 토기가 이번 전시의 대표유물인 듯 한데요.”
신라토기를 두고 필자가 동료와 나눈 대화이다. 웃는 모습의 토기는 불량한 것일까? 아니면 작품일까? 정상적인 토기 모양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런 기형(奇形)의 토기는 낯선 느낌을 준다. 낯선 느낌을 접할 때 사람들은 호불호가 갈린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작품은 사실 학습된 것의 효과인 경우가 많다.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난 특이한 모습의 토기를 이형(異形)토기라고 부르는데 웃고 있는 토기는 이에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불량품(?)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토기야말로 현대미술의 경향에 부합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하여 몇 자 적는다.
사람들이 미술 전시회에 가보면 간혹 당혹감을 느낀다고 한다. 심지어는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테크닉을 보여주는 미술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라 안정감을 준다. 그 화려한 테크닉과 세련된 솜씨를 부린 작가의 손놀림에 경탄을 금치 못해 엄지척 해준다. 그런데 아무런 테크닉도 없이 서툴고 촌스러우며 누구나 그릴수 있는 작품을 대할 때는 묘한 기분이 든다. 이것도 예술인가, 하고 말이다. 더 나아가 기괴하고 난해하여 아무도 알 수 없는 작품을 대할 때는 우리의 무지함을 탓하기도 하고 때론 불쾌함을 숨길 수 없다. 이것도 참, 예술인가, 하고 말이다.
우린 현대 미술의 흐름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 필자 역시 그 중 한 사람이다. 필자는 그래서 전시회에 가면 항상 작가에게 용기내어 물어 본다.
“작가님, 이 작품의 문제의식은 무엇인지요?”그럼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 배경과 의도를 설명해 준다. 설명을 듣고 나면 그 난해하게 보이는 작품이 조금 이해가 된다. 현대미술은 개념과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는게 많아 작품을 많이 봐야 한다. 많이 보되 용기내어 물어봐야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진다. 작품은 작가의 분신이다. 그의 마음이 그대로 표출된다.
천편일률적이고 틀에 박힌 그림을 좋아하던 때는 지났다. 아무리 고도의 테크닉을 부려도 별다른 감동이 없는 것은 이제 누구나 사진을 찍기 때문이다. 사람보다 기계가 낫지 않는가. 사람이 수십시간에 할 일을 카메라는 일초도 안 걸리고 한다. 그럼 AI가 등장한 오늘날, 예술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의성에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개성을 좋아하고 독창성을 뽐내고 싶어하는데 자기가 할 수 없으면 작가들에게 대리만족이라도 찾는다.
예전에는 단 하나의 절대고원이 있었고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천개의 고원이 있고 해답 또한 무수히 존재한다. 기존의 절대권위가 모두 해체되어 버린 세상이다. 그럼에도 작품에는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의 시대정신과 향토성과 그의 정신성이 담기게 마련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그곳은 몰입과 창조의 세계요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의 세계이다.
요즈음 여기저기서 전시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혹 낯설게 하는 작품을 만나면 주눅들지 말고 용기있게 작가에게 물어보자.
“이 작품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