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장발의 성화(聖畫) 미술
장발(張勃1901~2001)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화(聖畫) 화가로 카톨릭 미술의 초석을 놓은 서양화가였다. 장발의 부모는 대대로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으로 3남 4녀를 슬하에 두었다. 세아들인 장면과 장발, 그리고 장극 3형제는 인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화가인 장발의 두 살 위 형은 교육가이자 정치인인 장면(張勉)이었고, 띠동갑 12살 아래인 동생 장극(張勀)은 항공공학자였으니 장씨3형제에게 인천은 잊을 수 없는 고향이었다.
장발의 형인 장면은 천주교 선교사의 후원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 동생인 장발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 1925년 7월, 귀국길에 두 형제는 한국을 대표해 로마 바티칸시티에서 열린 <한국인 79위 순교복자 시복식>에 참석했다. 장발은 이때 카톨릭 미술의 정수(精髓)를 보고 큰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나도 성당 제단의 성화(聖畫)를 그리고 싶다. 주여, 저로 하여금 성화를 그리게 인도하소서.’라고 장발은 기도하였다. 그 때 장발의 나이 24살이었다.
필자가 본 장발의 그림들은 카톨릭 인물 성화로 순교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는 매우 독특한 화풍을 가지고 있다. 바로 보이론(Beuron) 화풍이었다. 그는 보이론 미술을 한국적으로 소화해 내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장발은 휘문고보에서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휘동을 만나 미술지도를 받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공부한 후, 내친김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국립디자인학교와 컬럼비아 사범대학 실용미술학부에서 미술실기와 미술이론을 배웠던 경력이 있었다. 그 기간이 7년이었다. 그는 당대의 미술사조를 접하고 그것을 자기화하는데 고심한 순간에 앞서 말한 대로 귀국길에 로마에 들렀던 것이다. 그는 로마에서 머물며 성당, 박물관, 미술관의 성화 순례를 하면서 감동을 받고 장차 카톨릭 성화를 그리고자 다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그가 카톨릭 성화를 그린 보이론 미술 기법은 무엇인가?
19세기 후반에 전통적인 예술 가치가 붕괴되자 카톨릭 미술계에서 새로운 시도를 펼친 것이 보이론(Beuron) 미술이었다. 보이론은 독일 남부의 작은 도시로 그곳에서 피터 렌츠(Peter Lenz)가 보이론 성화 제작법을 정립했다. 보이론 미술의 특징은 기하학을 성화 제작에 도입해 인물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고 인물의 표정을 엄숙하게 그리면서 자세와 동작 역시 정적으로 그려 절제미와 조형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화려한 화풍이 아니라 순교자의 정신만을 절제있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장발은 보이론을 도입하되 순교 성인에게 한복을 입히고 한국인의 얼과 정신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성 김대건 신부>(1928년 작) 그림은 도포차림에 갓을 쓴 채 성경과 종려나무를 들고 있는데 그 표정이 엄숙하고 단정해 한국인이 가진 품위를 잘 보여 준다.
그의 초기 작품에 <성녀 김골롬바와 아녜스 자매>(1925년 작)가 있다. 순교자들인 그녀들의 손에는 순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와 검이 들려 있고,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이 들려 있는데 그 자세는 정적이고 표정 역시 고요해 딱 그만큼의 절제미를 보여 준다. 또한 서울 명동성당의 <14사도들>(1926년 작) 역시 좌우대칭으로 인물을 배치하고 정신성을 강조하는 고요한 분위기를 여실없이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즐겨 경주 석굴암으로 달려가 그곳의 조각상을 보고 한국적인 영감을 얻고자 기도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가운데 고도의 정신성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현대미술의 추상성이 배어 있다. 그 사례가 바로 국립서울대의 로고, 즉 한글초성 ㄱㅅㄷ(샤)를 디자인한 학교 정문 심볼 말이다. 그는 서울대 미대 학장으로 15년 동안 재직하다 5.16 군사쿠테타로 인해 학교에서 물러났다. 형 장면이 용공분자로 몰려 정치보복을 당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그는 백살까지 살았다. 미국에서 40여년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미술계엔 서울대파와 홍익대파가 있는데 두 파의 원조가 스승과 제자 사이다. 스승 고휘동은 홍익대파의 원조였고 제자 장발은 서울대파의 원조였다.
그의 미술은 종교이자 삶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