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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창호 Oct 20. 2023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토기는 불을 이용한 인류 최초의 발명품이다. 누구나 경험해 본 바이지만 빗살무늬토기를 처음 알게 된 때는 어린시절이었을 것이다. 필자 역시 국사 책의 첫부분에 사진으로 나온 빗살무늬토기를 처음 보고 매우 멋지다고 생각했다.  

  머리빗의 살을 한자로 옮겨 즐문(櫛文)토기로 불린 빗살무늬토기는 사실 머리빗과는 별 상관이 없다. 핀란드의 알리오가 토기의 빗금선을 보고 콤(comb)이라 적었고, 일본의 후지다가 이를 그대로 이어 받아 즐문(櫛文)토기라 한자화한 게 시초였다.

  필자는 몇 달 동안 토기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검단신도시에서 출토된 토기를 자주 들여다 보았다. 또한 토기의 변천과정을 이리저리 조사해 보면서 빗살무늬토기에 놀라운 과학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기에는 고대인들의 과학과 예술이 담겨 있다. 

  1925년, 서울에서 엄청난 홍수가 일어났다. 그 유명한 을축년 대홍수였다. 그때 암사동 해안가의 표층이 드러나면서 수천년간 흙속에 잠자던 빗살무늬토기가 처음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일백년동안 전국의 해안가나 강가에서 포탄모양의 뾰족한 토기가 심심찮게 발굴되어 박물관에 전시되게 되었다. 

 인천의 검단신도시는 선사시대에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강과 낮은 구릉을 낀 검단에서 신석기인들은 토기를 만들어 썼다. 빗살무늬토기의 밑부분이 브이(V)자 모양으로 뾰족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음식을 조리할 때 불접촉면을 작게 하면 열을 빨리 받는 동시에 골고루 전달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토기안에 식재료를 넣고 끓이고, 삶고, 볶고, 찌고, 데치기 시작하면서 맛있는 음식이 개발되어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니 건강하게 되었다. 자연히 수명이 늘어나고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으니 토기의 등장이야말로 문명의 획기적인 도약이었다. 

  그럼 빗금을 사선으로 새긴 까닭은 무엇일까. 빗금을 긎지 않은 것과 달리 빗금을 그은 토기가 불에 더 단단해 진다. 즉 떡가래처럼 점토테를 말아 이를 층층히 쌓아 토기를 빚은 후 빗금을 그어 주면 위와 아래부분이 더 단단히 결합해 노천불에서 구울 때(500도) 갈라지거나 터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등장하는 무문토기 시대에는 점토에 석영과 장석 등의 유리질 광물질을 넣어 반죽해 토기를 빚어 지하식 굴가마에서 고온(900도)으로 더 단단하게 구울 수 있게 되자 빗금선이 필요없게 되었던 것이다. 

  토기의 일차적 목적은 음식을 요리하는 조리도구이다. 그래서 밑부분의 바닥면이 뾰족한 첨저(尖底)에서 출발해, 이후 좁으면서 평평한 평저(平底)로, 그리고 둥근 원저(圓底)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람에겐 먹는 게 가장 우선이다. 모래사장에 박기 위해 바닥을 뾰족하게 한 것이 과연 사실일까.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한 신석기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햇빛과 물이다. 태양의 햇빛과 하늘에서 내리는 비야말로 농사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러므로 빗금을 새겨 따사로운 햇빛을 기리고 적절히 비가 내리길 기원하였다. 토기에 새겨진 각종 기하학적인 문양은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다. 전시실에 올린 토기를 보며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생각해 본다.      

검단선사박물관 전시 <빗살무늬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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