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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창호 Dec 12. 2023

김교신과 한림, 그 의기(意氣)의 세계

  지난 2023년 11월 18일에 이화여대 대학교회에서 “김교신과 조국”이란 주제로 김교신선생기념학술대회가 열렸다.      

  필자는 이곳에서 ‘김교신과 한림’(박상익교수)이란 발표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왜 인상이 깊었을까? 그것은 이념전쟁이 심한 근현대사의 질곡에서 이념과 종교를 뛰어넘은 의기(意氣)의 세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념과 사상이 다르면 적대시하고 배척하기 쉽건만 그들에게는 정반대로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해 주는 의기로운 모습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근현대사에 보기 드문 귀중한 모습이었다.      

  일제 말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한 대표적인 문화운동은 조선어학회와 성서조선이다. 조선어학회사건은 잘 알려졌지만 성서조선사건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성서조선사건은 김교신이 쓴‘조와(弔蛙-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함)’라는 글이 조선 민족의 부활을 암시했다고 여긴 일제가 1942년 3월 성서조선을 강제 폐간(제158호)시키고, 주요 인물들을 1년간 감옥에 가둔 사건이다. 

김교신의 학창 시절 모습

   1927년 7월에 6인의 동인지로 출발한 <성서조선>은 1930년 5월부터는 김교신이 주필이 되어 자기의 사비를 털어 월간 발행을 책임지게 되었다. 교사의 월급으로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 일제가 군국주의의 길을 밟으면서 밖으로는 검열과 탄압이 심해졌고, 안으로는 신앙 동지들(정상훈, 류석동)의 이탈과 질시로 인해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끝까지 김교신을 도운 이는 함석헌과 송두용 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성서조선의 발간을 계속하라고 격려해준 이는 10년 선배인 다석 유영모와 고향 친구 한림(韓林, 1900~?)이었다. 특히 한림은 김교신을 가장 잘 아는 동향 친구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기독교인과 마르크스주의자가 동지가 될 수 있을까?      

  한림과 김교신의 고향은 함흥이다. 1919년 3·1운동이 함흥에선 3.3일 장날에 일어났다. 함흥만세운동 35명의 주도인물 중에 19살의 한림은 함흥고보 3년생으로 학생운동을 이끌어 2심에서 90대의 태형처분을 받았다. 한림은 감옥에서 성서를 읽으며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때부터 김교신에게 전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김교신은 예수를 사생아라고 조롱하였는데, 한림은 일본 유학가서도 계속 전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더니, 한림은 이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다니며 사회과학 독서에 심취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김교신은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생(生)은 알 수 없는 신비이다.     

한림의 옥중 모습

  한림은 학창시절 늘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다고 한다. 1931년 4월 발간된 <삼천리> 잡지에 의하면, 당시 조선에서 유일하게 『자본론』을 원문으로 읽은 인물은 한림이었다. 한림은 1928년 4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책임비서가 되었으나, 6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것이 ML(마르크스-레닌)당 사건이다. 그는 5년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사회주의 사상이 매우 강했던 조선일보 함남지사장을 하며 함흥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      

  한림이 옥중생활을 하던 1932년 1월 17일 한림의 모친이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함흥에서 서울로 왔을 때 김교신의 집에서 3박4일을 머물렀다. 그 정도로 한림과 김교신은 각별하였다. 한림이 옥중에 있을 때에도 김교신은 옥중에 갇힌 친구를 염려하는 일기를 많이 남겼다. 1933년 9월 6일 한림이 서대문 감옥을 나오던 날, 김교신은 새벽 5시에 일어니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마중을 나갔다. 몇 시간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8시에 할 수 없이 근무하던 양정고보로 등교한 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여관으로 찾아가 그리운 친구를 만났다. 그 정도로 한림을 각별히 생각하였다.      

  기독교 신자와 마르크스주의자는 서로 존경하고 흠모하는 외우(畏友)이자 지음(知音)이었다. 두 사람의 우정과 의리는 이념과 종교마저 뛰어 넘었다. 둘은 어려서부터 배운 유교적 소양과 선비적 기질이 공통적으로 있었고, 조국과 동포에 대한 뜨거운 사랑 역시 서로 통하였다. 김교신 입장에서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거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절대자 앞에 서겠다면서 신의가 없는 기독교회나 신자보다 더 낫게 보았던 것으로 본다. 진정성은 서로 통한다. 한림은 1940년 6월 만일 기독교인들이 <성서조선>을 외면한다면 자신이라도 돕겠으니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가라고 친구를 격려해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념과 사상이 달라도 의기(意氣)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은 진짜보다 가짜가 더 많다. 가짜가 진짜인양 허세를 부리나 시간이 지나면 누가 진짜인지 드러난다. 역사의 승부는 시간의 경과를 통해 누가 진짜인지 드러낸다. 진정성의 세계는 속알맹이의 세계이다. 씨알이다. 씨알은 속임이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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