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화란 무엇인가? 세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할 전망이 부재한 현대는 데카당스(Decadence, 퇴폐, 쇠락)의 시대이다. 사회가 쇠퇴하면 예술이 먼저 쇠퇴한다. 악한 세상과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데카당스로 그들은 소시민의 행복에 안주한다. 데카당스에게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보인다. 결국 자기의 행복과 쾌락만을 추구하게 된다. 니체는 그런 예술은 노예도덕을 받아들이는 우상이라고 보았다.
자본의 세상에서 자본주의의 근본만 파괴하지 않는다면 어떤 드라마든 영화든 허용된다. 돈만 벌면 되기 때문이다. 자본의 냉혹함을 보여 준 <오징어 게임>마저 상품으로 만드는 세상 아닌가.
도스토에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명장면은 둘째 아들 ‘이반’이 들려준 ‘대심문관’ 부분이다. ‘이반’의 견해는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기할 만한 주장이기에 설득력이 크다. ‘대심문관’에는 현대문화의 속성이 들어 있다. 그것은 자유의 박탈이다.
인간의 실존은 의식주를 필요로 하고, 때론 질병과 죽음과 같은 한계상황 하에선 기적을 원하기도 하고, 때론 혼란스런 상황 하에선 국가와 권력의 보호와 인도를 원한다. 기적, 신비, 권위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다.
대다수 인간은 정신적인 자유보다는 물질적인 빵을 대표로 하는 의식주와 육신의 행복을 원한다. 굶어 죽는 자에게 정신적인 자유는 사치에 불과하고, 빵이 없는 사람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실존이 본질보다 우선이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행복은 자기와 가족의 행복을 우선하고 그걸 쫓다가 삶을 마감한다. 그에겐 자기만 못한 자들은 희생양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니체는 이런 인간들을 인간 말종이라고 불렀다.
니체에 의하면 세상은 인간 말종이 대부분이다. 세상에는 주체성, 개성, 야성을 상실하고 획일적이고 평준화된 인간들이 넘쳐난다. 세상과 역사에 대한 비판정신이 없고 지인(知人)을 못하기에 인물에 대한 포폄(褒貶)을 거꾸로 한다. 자기의 행복에만 매몰되어 가족의 행복만을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
예수는 기적, 신비, 권세를 거부했으나 그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 예수는 빵을 만드는 기적을 거부했고 성전에서 뛰어내리지도 않고, 권력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성령을 받은 직후라 뜨거웠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십자가에서 처참한 죽음을 겪었다. 그는 자기의 세대가 끝나기 전에 종말과 심판이 내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종말은 오지 않았다. 2천 년이 지나도록 심판은 오지 않고 있다. 기적과 구원을 기다렸던 이들은 절망한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그들의 자유를 교황이나 국가에 맡기고 스스로 노예가 되어 그들이 주는 빵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대심문관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사실 대심문관은 신을 믿지 않는 자로 스스로 속이는 자이다. 대심문관은 신의 이름으로 지상의 왕국을 건설했다고 강변한다. 예수는 침묵한 채 대심문관(추기경)에게 키스를 남기고 떠나간다. 그의 키스는 감사인가? 용서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무거운 짐이고 고통이 따른다. 이 고통은 선과 악을 체험하는 과정이며 분열과 비극을 체험하는 시련이며, 때론 불안과 혼란을 거쳐야 한다. 이 세상은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불안전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자유를 반납하는 것이며 기적과 요행을 구하는 길이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알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로 사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극복해 나갈 때 진정한 인간이라는 역설이 존재한다. 자신의 자유를 기적의 빵에 헌납하는 자에게 자유는 없다. 자유는 주장하는 자에게 있지 박탈당해 헌납한 자에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