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미술사 연구소가 필요하다

by 연창호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이 참가할 때 우리나라를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는 상징물로 제작하고자 한 것이 <제물포 거리>였다고 한다. 이 계획은 비록 최종적으로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참가하려고 만든 제물포 거리의 도면은 아직도 남아 있다. 당시 세계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데 가장 적합한 장소는 외국 조계지가 있던 근대 도시, 제물포항이었던 셈이다.

개항기에 인천은 한국의 근대성과 문화접변을 보여 주는 최적의 장소였다. 제물포는 한국인과 외국인이 공존하는 곳으로 융합과 혼종의 도시였다. 동서양의 문화가 제물포에서 한바탕 혼종을 이루다가 서울로 이동했다. 문제는 인천과 서울이 너무 인접해 있어 인천에서 숙성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전에 서울로 건너가 버렸다는 데 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한 중심지 서울과 변방 인천의 관계는 백 년 넘게 지속되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기존 관계에 균열이 일어났다. 모두가 중심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한 개의 고원이 아니라 천 개의 고원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미술이란 말이 처음 나온 것은 1881년 일본으로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보고서에서 유래한다. 박정양은 농상무성 산하에 있는 박물국을 설명하면서 그곳의 주요 업무가 옛 물건을 조사하고 미술을 보존하며 권장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국 근대미술의 출발은 서구 근대미술과의 접촉에서 시작하고 그 창구는 일본이었다.

그럼 인천 근대미술의 시초는 어느 때이고 어디가 근원지였을까. 1920~30년대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김은호(金殷鎬1892~1979)와 김영건(金永健1915~1978)이 등장하기 전의 <의성사숙(意誠私塾)>이 인천 근대미술의 뿌리이다. 의성사숙은 1908년 인천 창영동에 취헌(醉軒) 김병훈(金炳勳1863~?)이 한학을 가르치던 글방이었다. 그런데 의성사숙에서는 동양고전뿐만 아니라 사군자와 산수화를 가르쳐서 그 문하에서 조벽가, 박정자, 정규성, 김종택, 최봉래 등의 화가가 배출되었다. 물론 의성사숙을 나온 대표 인물로 고유섭을 빼놓을 수 없다. 고유섭은 한국미술사의 기초를 놓은 분이다. 기생 출신의 화가인 오귀숙(吳貴淑1900~?) 또한 의성사숙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오귀숙은 인천 영화학교에서 3년을 수학하고 김응원, 김규진, 김용진에게서 그림을 배웠는데 기생 출신이라 화제를 끌었다.

인천의 근대미술은 중국, 서울, 일본이 혼융되고 융합된 상태로 개방성은 뛰어나지만 고유성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고유성이 부족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실 지역 향토사에 관한 연구 부족에서 기인한다. 오귀숙의 경우도 최근 조사된 것이다. 아직도 미발굴된 작가와 작품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다른 도시들의 지역 미술사 연구는 어떠한가. 전주, 광주, 대구는 활발하다. 예를 들면 광주는 의병 출신의 화가 가석(可石) 김도숙(金道淑1872~1943)을 최근 밝혀냈다. 김도숙은 호남의병의 도총장으로 일했는데 그가 남긴 병풍 두 개를 발견하고 조사하여 호남미술사의 빈 공백을 채우게 되었다. 이처럼 중앙의 미술사가 채우지 못하는 틈을 지역의 미술사가 채워주어야 한다.

미술은 중심지 서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곳이든 그 지역의 미술은 존재한다. 인천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역의 미술사는 1차적으로 시간의 흐름대로 구체적인 연대기를 정리하고 그에 따른 공간을 정리해야 한다. 이런 기초 작업의 토대 위에서야 지역 미술사의 독자성을 정립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천미술사 연구소의 설립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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