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의 석탑 연구

왜 석탑을 연구했을까

by 연창호

오늘날 문화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여 향유된다. 문화의 시대에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의 미(美)를 탐구한 우현 고유섭(1905~1944)은 특별한 분이다. 우현은 한국인의 미의식이 무엇인지 탐구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서 다시 한번 우현 고유섭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변이불변(變而不變)하며 문화는 계속해서 업데이트된다. 한국인의 미의식은 작품으로 나타난다. 우현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있지만 ‘자연의 미’는 우리 역사에서 불변이라고 보았다. 우현이 한국의 미라고 말한 무기교의 기교, 즉‘자연의 미’는 오늘날에도 드라마, 영화, 음악, 음식 등 여러 방면에 적용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현의 한국미술사는 미학에서 출발한다. 우현은 미(美)를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식적 앎’이라고 보았는데 매우 현대적인 관점이다. 인식적 앎은 재구성의 세계이다. 우현은 대학 졸업 후 15년간 방대한 글을 쓰고 사십이 되기 전에 생을 마감했다.


우현의 글은 악전고투의 산물이다. 피로서 글을 썼다. “생활과 다투어야 하고, 세상 사람과 다투어야 하고, 병과 다투어야 한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의 환경은 열악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고 한국의 미를 탐구했다. 특히 우현은 한국의 석탑사 연구에서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그가 남긴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는 한국 고전 100권에 속할 정도로 학문적 가치가 높다. 그럼, 우현은 왜 한국의 석탑을 연구하게 되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 민족의 창조성을 보여줄 만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석탑이라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석탑은 건축물인 동시에 미술품이다. 석탑에는 한국인의 예술정신이 표현되어 면면히 계승되어 왔다. 중국에 전탑이 있고 일본에 목탑이 있다면 우리에겐 우리 고유의 석탑이 있다.

한국의 석탑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처음 시도한 학자들은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조선고적도보>, <조선미술사> 등이 먼저 발간되었다. 그러나 그 조사 연구는 한국미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식민주의 사관에 물들어 있었다. 일본문화를 우위에 두고 한국문화를 하위에 두는 것을 전제하였다. 얼핏 보면 측량 실측, 사진과 해설이 있어 실증적, 객관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한국 문화의 정체성(停滯性)을 증명하는 도구였다. 한국미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외면하였다.

계양구청 홍보팀 계양산성 관련 사진  (1).jpg


이에 대해 우현은 우리 문화의 창조성과 자주성을 주장하고 싶었고, 무형이 아닌 유형의 문화유산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의 탑파(塔婆)를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 한국문화의 주류는 불교미술이고, 불교미술의 대표가 석탑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석탑에는 우리 민족의 당당함과 웅건함이 배여 있어 우리 민족의 숭고한 기상을 알리는데 석탑만 한 것이 없다고 보았다.


석탑은 숭고미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감은사석탑, 불국사석탑을 가 보라. 거기에는 한국인의 미의식이 응축되어 있다. 탑은 장식의 기교를 버리고 수직의 힘과 균형을 택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수직으로 치솟는 탑에서 기교를 넘어선 무기교를 볼 수 있고, 절제된 단아함과 긴장감, 정신의 초월성과 숭고함, 비움과 침묵, 여운의 미를 볼 수 있다. 석탑에는 이렇게 구수한 큰 맛이라는 한국의 미의식이 어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화 역량이 크면 클수록 세계 속으로 한국 문화가 힘차게 뻗어 나갈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미가 자연의 미라는 우현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고 보편성을 띠고 있다.


석탑은 전국 도처에 있으니 이 시간 찾아 가보길 권해 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우현 고유섭의 미의식과 현대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