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쉽게 아물게 하는 것은 욕심이다. 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D가 나에게 준 교훈이다. 놀랄만큼 나를 닮아있는(혹은 내가 D를 닮아있는) D와 대화를 하는 것은 마치 거울을 앞에 두고 나와 내가 묵혀뒀던 대화를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 의도치 않게 한 치도 숨길 수 없는 대화. 내가 숨으려는 것을 D는 찾아냈고 D가 숨고싶은 곳은 내가 차단하는 그런 대화. 서로가 모든 단어를 테이블 위에 나열하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싶은지 너무 잘 아는 사람을 만나는 기분은 마치 운명적인 만남처럼 들리겠지만 실상은 그 감정의 무게가 너무 커 몸살이 난 것처럼 앓게 된다. 마치 만나서는 안될 도플갱어가 우연히 마주쳐 어쩔 줄 모르는 채로 벌벌떠는 것 같은 모양새랄까.
D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은 것은 나는 아직 풀지못한 숙제를 짐처럼 안고 살아가고있다는 사실. 지난 관계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그 해답을 다음 관계에서 찾고자 노력했던 것. 그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가 어떤 실패도 시련도 없이 잘 헤쳐나가고있다는 것은 무리하게 증명하고자 애를 썼다는 것. 그래서 두 번째의 짧은 관계가 끝났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은 내가 처음 관계가 끝났을 때 미처 소화하지 못했던 좌절과 슬픔, 모른채 하려고 했던 내가 크게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몰려왔기 때문이라는 점.
D는 고작 두 번의 만남에서 나의 어두운 우물 바닥을 들여다보는 대에 성공했다. 그리고는 혹시나 내가 경계성 성격 장애를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남긴채로. 권태로움과 우울을 쉽게 느끼고 감정 기복이 심하며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심한 경우 자해까지 이어진다는 무서운 단어들을 보고 난 뒤로 다시 그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D가 나에게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이미 그가 마주해온 경험이 내 앞에 펼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지. 우리는 마치 서로의 거울과 같으니까. 단지 그가 내가 앞으로 겪어올 일들을 미리 겪어온 것 뿐. 마치 미래의 내가 가장 필요한 시점에 나에게 따듯하게 찾아와 손을 건내는 듯한 경험이다.
상처를 쉽게 아물게 할 수는 없지만 조금씩 아물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중요하다. D가 갑작스럽게 내 삶에 찾아와 메세지를 남기고 떠난 것은 그 과정을 천천히 마주하고 쉽게 상처받는 나를 가장 잘 돌보라는 계시인거겠지. 세상 밖은 우리같은 사람에게 너무 위험천만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