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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여자 Nov 24. 2022

여자도 임차인, 남자도 임차인.

어쩌다 보니 투자자 2.

시계는 재깍재깍 정해진 속도에 맞춰 잘도 돌아가는데 여전히 나는 주어진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일이 고되다는 생각이 들 때면 혼자 되뇌었다.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어'


'이런 생각조차 배부른 투정일지도 몰라.' 






남자는 군인이다.

강원도 최전방에서 근무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휴가를 내고 서울로 왔다. 나 역시 남자가 다녀간 2주 뒤 휴가를 내서 남자 곁으로 갔다. 그렇게 달에 반을 나눠서 한 번씩 오갔다. 


2주에 한 번 만나면서 오랜 기간 연애를 했다. 장거리 연애를 하면 할수록 욕심은 더 없어졌다. 선물도 필요 없고, 좋은 차도 필요 없고, 신축 건물의 초역세권 근사한 자취방도 필요 없었다. 그저 그냥 온전히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애초에 그 시간을 찾아 서울로 온 거였다. 처음 만남을 시작했을 땐 남자는 두 달에 한 번 제주도로 왔고, 나 역시 남자가 다녀간 다음 달에 강원도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그렇게 서로 오고 가며 한 달에 한 번은 꼭 만났다. 있지도 않은 워크숍을 전국에 개최시켜서 다녀오는 길엔 벌써 다음번 핑계는 뭘로 삼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핑계도 핑계였지만 일 년 동안 고작 40일의 만남을 더는 이어 갈 자신이 없었다. 남자 곁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교통수단 중 비행기만 빼더라도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서울을 택했다.


바로 취업할 생각은 없었다.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던 공부를 시작했다. 노량진에서 수업을 듣고 친구 집에서 잠시 신세를 졌다. 친구는 미아역 반지하에 살고 있었다. 고정 지출비를 줄여보려고 악착같이 모아서 전세 2천만 원의 그 집으로 들어갔다. 햇볕 한 줌이 들지 않던 어두 컴컴한 그 방을 잊을 수가 없다. 


하던 공부를 빠르게 정리하고 취업을 했다. 합격자 명단을 보고도 믿지 못했다. 다시 봐도 합격이 맞는데 말이다. 첫 직장을 구할 때는 그렇게도 미끄러지더니 몸에 엿이 붙었나 넣는 곳마다 알아서 척척 잘도 붙었다. 그렇게 우린 물리적으로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연애를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고 친구처럼 나 또한 각박한 서울 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혼자서 세대를 꾸리는 첫 집이었다. 보증금 3천5백만 원이 혹시나 달아나진 않을까 두려워 계약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동사무소로 뛰어가 전입신고를 했다. 확정일자도 받았다. 


사글세(년 세)를 내고 살 때와 기분이 달랐다. 같은 임차인이지만 연세는 일 년이 지나면 집을 원 상태 그대로 돌려주기만 하면 됐고 내가 따로 돌려받을 건 없었다. 맡겨 놓은 게 없으니 혹시나 돈이 떼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비교적 깔끔한 금전 거래였고 심적 부담감 또한 없었다. 


하지만 반 전세는 달랐다. 사회 생활하며 내 딴에는 바지런히 모은다고 모은 얼마 안 되는 전 재산과 부모님께 빌려온 목돈을 합해 고스란히 임대인의 통장으로 넣었으니 퇴거 시 혹여나 돈을 받지 못하면 어쩌나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무서웠고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 세입자가 되어 보니 두렵고 무서운 마음과는 또 상반되게 우습지만 무게감이 있어 보였고 사회 초년생이 어른 놀이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갈 때도 시내버스를 타고 복잡한 중심도시로 들어갈 때도 버스 옆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차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차가 너무 많아 브레이크등이 꺼질 틈이 없는 혼잡한 이 거리에 왜 내 차는 없을까.'

'뭐가 문제일까. 분명 나도 돈을 벌고 있는데 왜 내겐 없고 저들에겐 있을까.'


혼자 상념에 빠지곤 했다. 


'이 넓은 땅 덩어리에 번듯한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까.'

'이 월급 받아서 쉰 정도 되면 가능할까.'

'이 사회에서 나는 지금 어느 정도 위치에 서 있을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던 시간들이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 손에 등기부등본 따위가 생길 리 없다고 생각했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회초년생들이 겪는 막막한 미래를 나 역시 겪어야만 했던 가슴 시리던 날들이었다.  







이 무렵 남자는 속초에서 전세 2천만 원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저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임차인이었다.


여자도 임차인, 남자도 임차인.


임차인과 임차인이 만나 다시 임차인이 되는 건 우리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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