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세이브, 마음도 세이브
나이 들면서, 혹은 체력이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에게 변화가 하나 생겼다. 바로 회피 성향.
분명 J인데, 여행 전날이 되어서야 짐을 싸고,
할 일을 가능한 한 미루는 일이 잦아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미뤄온 일 하나는 냉장고, 냉동고 정리. 평소 조금씩만 정리하면 되는데, 그 조금씩의 외면이 쌓이니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냉동고에 식재료가 제대로 정리가 안 되어 있으니 꺼내 먹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먹을 게 없어서 또 자꾸 사게 되고, 냉장고엔 음식이 차고…
다 먹지 못해 이미 생명을 다한 식재료들도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요리 자체를 회피하게 되었다.
꾸준히 회피하다 보니 이제 내 마음속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그래, 이제 정리하자."
그런데, 사라진 줄 알았던 회피 본능이 다른 형태로 마지막까지 나를 꼬신다. 정리 정돈 전문 이모님을 부를까? 이왕 정리하는 김에 흐트러지지 않게… 하다가, 이번엔 냉장고를 바꿔야겠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그래... 어차피 냉장고가 꽤 오래되기도 했지. 구형이라 4 문형도 아니고, 냉동고 칸이 좁아 아무래도 정리를 해도 한계가 있는 거야...
90%쯤 마음이 기울었을 때, 신랑의 한마디에 자극을 받았다. "냉장고 필요하면 사는데, 굳이 쓸 수 있는 걸 바꾸는 건 아닌 것 같아."
뜨끔했다.
평소 나는 크게 낭비를 하지 않고 살고, 또 그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도 있다. 그런데 막상 이런 게 진짜 낭비가 아닌가... 내 게으름을 포장했던 얄팍한 포장지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생각보다는 정리가 수월했다.
우리가 겉모습에만 압도당하면 실체보다 더 크게 느끼기 마련인 듯싶다.
최근에 무질서하게 쌓인 부분을 걷어내니 그래도 조금쯤은 비슷한 것들끼리 모여 있는 형태쯤은 유지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럼에도 5리터짜리 음식물 쓰레기봉지를 가득 채워 8봉 다리 정도 버린 것 같다. 적어도 2시간은 치운 것 같다.)
그렇지만, 하고 나니 너무 좋다.
돈도 세이브하고,
게으름에 지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도 세이브한 느낌!
자녀를 칭찬할 때도, 하기 싫었지만 해낸 부분을 칭찬해 주라고 한다. 그건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는 말인 것 같다.
하기 싫은 걸 이겨내고 해서 참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