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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텐슈 Dec 03. 2019

시작하기 좋은 낮은 허들, 해발 300미터

매일 하려면 허들이 낮아야해

내게 산을 가는 일은 가족들과 주말에 유명한 산을 가는 일이었다. 그런 산들은 집에서 최소 두세 시간은 차를 타고 간다. 왕복 6시간은 이동에 써야 하니, 산행 시간을 4시간으로 잡아도 하루를 온전히 써야 한다. 나는 책상에 하루 종일 앉아있던 사람으로, 4시간 등산은 너무나 벅찼다. 아주 초반에만 산내음에 감탄하다가 곧 주저앉고, 끝에는 기어올라가야 하는 체력이었다. 산을 잘 타는 부모님과 함께 오르면 그분들은 평온한 얼굴로 나를 아이고, 하고 바라보며 기다려주신다.

그러다 팔을 다치고 어쩔 수 없이 방에서 요양을 하던 때, 걸어도 어깨가 흔들려 아플 때, 뒷산이 늘 위엄 있게 내 창문에 서 있었다. 튼튼하게, 굳세게, 우렁차게! 자신의 산세를 뽐내면서. 그러다 6주간의 근신이 끝이 났고, 위엄 있는 그 산(조금 더 나아진 뒤에 갔다.) 말고 작은 옆산에 갔다. 그 산은 고작 300미터였지만 정상에 오르면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인 데다 정자에 걸터앉아서 보는 경치는 산수화가 따로 없었다. 그때는 그것도 헥헥대며 올랐지만 내려올 때는 할만하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풍족해졌다. 내일도, 모레도 또 오르고 싶다는 마음이 솟았다.


2년 정도 수영에 빠져있을 때, 수영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일 새벽에 또 오고 싶어 했다. 자전거에 흠뻑 빠져있을 때도, 내일 또 달리고 싶다고 했다. 12시까지 공부를 하고 책을 덮을 때도 내일 일어나서 얼른 부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런 마음이, 시키지 않아도 꾸준하게 는 원동력이더라. 적당해서일까.


지금껏 내 능력에 비해서 힘든 산을 올랐기 때문일까. 산은 늘 각오를 하고 올라야 하는 도전적인 무대였는데, 저 산은 내일도 모레도 계속 올라도 부담이 없는 산이다. 그때, 내가 넘을 수 있는 허들의 높이는 해발 300미터였던 것이다. 부모님의 허들은 최소 800미터이지 않았을까.


한라산을 다녀온 지 이제 2주가 지났다. 해발 1940미터. 매일 그런 산을 오를 수는 없다. 그건 특별한 이벤트다. 그 산을 오르기 전에, 해발 600미터인 산을 하루에 20키로씩 오가며 훈련을 했다. 처음에 멋모르고 며칠 할 때는 몰랐는데, 점점 한 번 나서면 6시간 이상 걸린다는 걸 가늠하게 됐다. 그러니 문을 나서기 전에도, 6시간이라는 시간이 둥둥 떠다니고, 그게 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게다가 이제는 한라산이라는 거대 목표, 상징을 달성하고 나니 매일 20키로씩 산을 탈만큼의 재미도 줄어들었다.

며칠 전, 엄마가 아파트 굴다리를 넘어가면 만나는 등산로를 알려주셨다. 그 길로 다니기 시작한 지, 이제 2주 정도 됐다. 다녀오는데 1시간이면 족하고, 걸음수로는 만보 정도 된다. 매일 하려면 허들이 낮아야 한다. 300미터는 매일 오를 만했다는 경험. 내일 또 가고 싶다는 상쾌함이 들었던 과거가 떠오른다. 시작할 때 허들이 낮아야, 매일 할 수 있다. 하루 한 시간, 만보 정도면 매일 할 수 있겠다.

첫 눈이 와요

반환점 벤치에 앉아서 글을 쓰는데 눈이 온다. 첫눈이다. 그리고 이내 추워진다. 올라올 때는 땀이 나서 더웠는데 글을 쓰는 동안 금세 식어버렸다. 아빠가, 등산을 시작했으면 처음 복장 그대로 하산하라고 하셨다. 중간에 덥다고 옷을 벗었다가 입었다가 하지 말고. 왜 그럴까, 물론 체온 유지 때문일 테지만, 오늘 하나 부연해보자면. 멈추기 위해서가 아닐까. 걸어오면서 벌어놓은 열을 대가로 잠시 벤치에 앉아서 글을 썼다. 아까 덥다고 바로바로 지퍼를 열어젖혔으면 나는 잠시 앉아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올해의 첫눈을 맞으며.
2019년 12월 3일

구름산에서
<어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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