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가을, 독서대전에서 박웅현 카피라이터의 강연을 들었다. 3월에 노홍철 특별전에 초대됐을 때, 옆 자리에 앉았던 분이 인생 책으로 추천한 책이 바로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였고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트리거가 없었다. 그가 강연을 온다는 소식으로 드디어 방아쇠는 당겨졌고 그의 책을 연달아 읽은 뒤, 강연장에 갔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강연의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그분이 주도적으로 자신의 이야기, 책 보다 더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기대했는데 가보니 독서모임 회원 예닐곱 분이 각자 준비해온 질문지를 국어시간처럼 딱딱하게 질문하고 그에 대한 박웅현 저자의 답을 듣는 시간이었다. 멀리서 왔고, 오늘을 위해 책을 여러 권 미리 읽어왔고, 같이 듣자며 친구까지 데려왔는데 생각한 방식이 아니자 집중력도 떨어지고 괜히 왔다는 생각으로 쳐졌다. 그러면서 강연장에서 들리는 소리와 점점 멀어지려는데, 박웅현 분이 그런 말을 한다.
자신도, 여기에 몇 시간이 걸려서 왔다고, 그리고 와보니 내가 생각한 것과 달라서 실망이 들 수도 있다고, 그래도 자기는 이곳에 왔고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에 충실할 것이라고.
집중력이 떨어져서 시선은 내 스마트폰으로 와있었지만 귀는 다시 쫑긋했다. 나를 지목해서 하는 말처럼 나를 위한 말이었다.여기 앉은 청자인 나뿐 아니라 화자인 저분도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를 수 있겠구나.
이 순간, 지금 있는 이 순간에 나도 시간을 내어 이곳까지 왔으니 여기에,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자.
다른 무엇보다도 그때, 그 정신 차림이 기억난다.
그 후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는 책을 만났고, 이 순간을 온 마음을 다해 느끼려고 한다.
그래서 공항에서 대기하는 그 순간에, 나는 그 순간을 즐겼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나 보다.
여행이 재미있었나? 내 생각대로 흘러갔나? 그런 것보다도 그 순간을 즐겼는가, 가 떠올랐다는 점이 나로서는 조금 뿌듯하다.
내가 다녀온 곶자왈은, 처음에는 내가 생각한 모습은 아니었다. 테마파크 대신, 정말로 자연 그대로인 곶자왈을 방문해보고 싶었는데 에코랜드는 초반 1, 2코스에서는 포토존만 즐비했기 때문이다. 사진만 찍으면 무슨 소용인가 싶어, 나는 누워서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 바라보고 흔들리는 갈대에 시선을 쏟다가 까마귀 날아다니는 걸 관찰하며 좋아했다. 간간히 아빠가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으라고 서보라고 할 때는 속으로는 살짝 귀찮아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다시 찍은 사진을 보니 그곳이 참 예뻐 보인다. 그 순간을 귀찮아했는데 말이다. 그 귀찮음이 지나고 세 번째 구간에서 에코로드라는 곶자왈 산책코스를 만났을 때는 진심으로 그 순간을 만끽했다.
마지막 날, 2시에 산행이 마무리되고 비행기는 10시라서 8시간 정도의 텀이 있었다. 시간이 충분해서 지난번 자전거 종주 때 위엄에 반했던 산방산을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서귀포 끝과 제주 끝이라, 다시 공항으로 돌아오려면 왕복 버스 소요시간이 길 테지만, 버스에서 산행의 피로를 좀 가시면 될 거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181번 버스에 일단 올라타고 나서, 구체적인 경로를 살펴보니 뚜벅이의 버스 환승으로는 편도로 1시간 50분가량이 걸린단다. 대충 1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먼 거리를 가는 버스를 탔는데, 이러다 버스만 타고 이동만 하는 것이 아닐까, 잘못한 선택이 아닐까, 그런 책임론이 부상했다.
왕복 4시간, 식사시간 2시간 그리고 호텔에 맡겨둔 짐을 찾으러 가려면 또 1시간의 여유시간, 공항에는 1시간 전에 도착해야 하는 여유시간, 그렇게 따지니 산방산에 머물시간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1/3 즈음 갔을 때 아빠한테 다시 제주시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순환버스라서, 그대로 타고 가도 제주시에 가긴 간다. 그런데, 어플에는 반대방향으로 바꿔 타면 조금 더 빠르다기에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우리는 내린 곳에서 귤을 사 먹고, 제주시와는 달리 청명한 서귀포시의 날씨, 그리고 하필이면 한라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딱 내리게 되어서 조금 그 순간을 만끽했다. 감귤나무와도 다정한 사진을 남기고.
그래도 내가 거기에서 본 한라산은 참으로 멋졌다. 감귤나무도 처음으로 봐서 신기하고 좋았는데, 그래도 자꾸만 ‘다녀와도 됐겠다, 됐겠다.’
5시가 되어, 호텔에 와서 맡겨둔 등산가방을 찾았다. 3시간이 넘게 버스 여정을 한 것이다. 용두암을 둘러보고 저녁을 먹어도, 7시다. 아직 비행기 뜨려면 3시간이나 남았는데, 우리는 공항으로 왔고 해외도 아닌데 2시간 넘는 대기를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디에 다녀와도 시간상으로 여유가 있을까, 그걸 계산하는 게 나는 좀 서툰가 보다. 아쉽긴 하다. 산방산.
우왕좌왕한 오후였지만그래도 나는 이 순간을 즐겼는가.
힘은자라나는것이다. 무럭무럭
이 순간을 즐겼는가, 의 사색을 마치고는 힘은 자라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힘내!라는 말이 요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낼 힘도 없는데 힘을 내라고 해서가 아닐까. 힘이란 게 근육인데, 근육 없는 사람에게 힘! 지금부터 내!라고 해서 날리도 없고. 힘은 단련으로 무럭무럭 자라나는 건데.
공항에서 나는 이번 여행으로 내 힘이 조금 자라났다고 느꼈다. 그리고 추세선 상으로는 나는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는 것도 함께. 그러니 내게 물을 주고, 맛있는 것을 먹여가며 나를 키우자. 흙갈이도 해가며 계속해서 무럭무럭 자라나게 경험을 쌓자.
힘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거니까.
제 힘은 자라나고 있어요.
별 박힌 오리온자리 그리고 누운 달
은하수를 잡을 만큼 높다는 한라산, 자정이 다가올 무렵 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캄캄한 시골길에 불빛 공해 없는 그곳에서는 유난히 별이 밝았다. 오리온자리가 선명하게 박혀있다. 코스모스를 보고 나니, 옛사람들은 별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이입을 해보곤 하는데, 오늘은 하늘에 별을 박았다는 표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은하수를 육안으로 본 적이 없다. 운전하는 아빠에게 여쭤보니 어릴 적 육안으로 은하수를 본 적이 있으시단다. 부럽네요. 그러더니 신호등에 멈춰 서서 아빠도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본다.
'그렇네, 오늘 유난히 밝다.'
집에 도착해서 다시 별을 보자고 했지만, 별은 늘 밝지만 우리가 별을 보기에 너무 밝게 산다. 밝아진 도시에선 아까의 쏟아질듯한 별을 볼 수 없다.
빛공해가 심한 지금, 어디에 가면 은하수를 육안으로 볼 수 있으려나. 쏟아지는 별빛, 그런 건 언제 또 실감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