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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텐슈 Jan 06. 2020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저지르자, 꽃을 피우자.

2020년을 맞이하고, 19년에게는 안녕을

올해가 시작되는 경계에 섰을 때, 나는 경계에 섰다는 와 닿음이 느껴지지 않아 어제처럼, 그리고 오늘처럼 하루를 이어가려고 했다. 그래도 지나간 과거와 깔끔히 안녕하는 일은 복기, 되돌아보기라고 생각하므로 이런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정초에 먹은 굴로 며칠을 배앓이를 하느라 시기가 늦어졌다.

요즘 들어 과거의 내가 참 매서웠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한다는 말에는 왜 그래야 하냐고 따졌고, 남들 다 하는 것에는 관심 없었다. 독창적이고 차별화된 무언가를 가지려 했다. 평범한 건 너무 지루하고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평범한 것이 인생을 낭비하는가, 쓸데없는 에너지 싸움이 인생을 낭비하는가로 옮겨왔다.


백세시대, 백세시대라고 주변에서 이야기들 많이 해서 가만히 듣다 보면, 시야가 100년의 스케일로 자리 잡곤 한다. 장기적인 시각이라고 합리화할 순 있지만 가끔 시간은 뭐 많으니까 나중에 하자, 로 무마할 때가 있다. 그런데 요즘은 시간의 유한함을 꽤 실감한다. 어느덧 생의 1/4과 1/3 사이를 지나고 있다. 1/3.5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100에서 시작한 3.5는 결국엔 1로 수렴할 것이다. 실로 한계를 체감하고, 건강하지 않으면 그 시간조차 밀도 있게 쓰지 못하겠다는 매서움이 강하게 나를 때린다.


그래서 에너지 분배를 어떻게 하고 살아갈 것인가, 가 요즘 내 화두다. 병이 나는 이유는 적당하지 않아서고, 과함과 부족함이 원인일 텐데 아직 부족함이 일으키는 병은  잘 인식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과함에서 얻는 병은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서 알게 된다. 일을 하면서, 그리고 배우면서, 운동을 하면서, 음식을 먹으면서, 과함이 문제였다. 배가 고플 때, 맛있는 음식을 보고도 적당히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보자. 재미있어도 적당히 멈춰보는 사람이 되어보자. 알고는 있지만 완전히 체화되지 못한 것들이다.


최근 허리 근육을 위해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수영장에 가면 수영을 잘하던 초보시절보다, 가장 잘하던 시절을 떠올린다. 음식을 보면, 적당히 맛있었던 기억보다 저 음식을 먹었던 기억 중에 가장 맛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면, 2년 만에 온 수영장에서 처음엔 가볍게 발차기 정도만 해야 하는데, 그러다 서서히 완만하게 운동량을 늘려야 하는데 나는 운동 강도를 순간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하루에 사용 가능한 에너지 총량이 100이라고 하면, 아침 운동에는 10 정도, 애피타이저처럼 식욕을 돋게 할 정도로 하루의 시작을 맛있게 하는 정도로 마무리해야 하는데, 수영을 하다 보면 폭풍 수영을 하고 있다. 에너지 7-80을 쓰고 오면, 돌아와서 회복하며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운동선수가 아니고서는 하루를 영위하기 버겁다. 과연, 이게 수영에만 나타나는 패턴이겠는가. 알고 있지만 잘 수행하지 못하는 것들은 반성할 때마다 따끔하다.


경계에 서서 중심을 잡는 것에도 에너지가 든다. 내가 하는 생각 하나, 말 한마디 그리고 분노 하나도 내 에너지다. 에너지 보존을 위해 참아야 할 것과 모른 척 눈 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걸 알아간다. 그래서 아침이면 되도록 내 과한 열정이 그래프를 뚫지 않도록, 비워내는 데에 집중한다. 나를 비워내는 책을 읽고, 시를 읽는다. 그러면 하루 그래프의 시작점을 좀 낮게 가질 수 있다. 글도 아름다운 글 대신, 솔직한 고군분투의 글을 남기려 애쓴다. 밤이 아니라 아침에 일기를 쓴다. 그리고 나는 별 것 아니며 죽음은 언제든 곁에 있으며 시선이 닿지 않을 만큼 먼 우주를 올려다본다.




문제 해결 방식. 저지르는 방식. 꽃을 피우는 방법.

국가도 그러하지만 개인도 문제 해결 방식은 과거 선례들의 연장선에서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익숙하게 성공했던 대로 후에도 행할 가능성이 크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기업에서도 자기소개서에 문제 해결 방식을 물어보는 것일 테다. 내가 더 나은 해결 능력을 탑재하고 싶다면, 다른 방식으로도 계속해서 좋았던 선례를 남겨야 한다. 그래야 추후 문제 해결 상황에서 그 방법을 떠올린다. 탁월해지자. 내가 다리 뻗는 세상을 넓히려면 네트워크를 넓혀가야 한다고 보는데, 그건 지식으로 이을 수도 있고 사람으로 이을 수도 있고, 이런 사건 처리로도 이을 수 있다. 문제 해결 방식, 저지르는 방식, 그리고 꽃을 피우는 방식도 제 나름대로겠지만 사람은 한 가지 방식에 깊은 신뢰가 있다. 나에게 맞는 방법을 계속 찾아가는 지금의 과정에서, 나는 더욱더 저지르고 수습하고, 떨어진 물도 다시 담아보려 애쓰며 나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2019년은 내게 어떤 해였나, 하면 한계선을 넘었던 해였다. 책을 냈고, 책으로 만들어지는 파장에서 이게 뭐지 싶어 멈추고 싶다가 또 흐름대로 흘러가다가 아, 이런 거구나 알게 되는 과정이었다. 이 이야기는  눌러 담아야 앞으로 전진하겠다 싶어서, 2019년이 가기 전에 글로 남겼다. <내 책이 나와 닮았는가>에 기록해두었다. 친구들은 내 발걸음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한다. 남들이 이만큼 걸어갈 때, 너는 고작 요만큼 넘지 않았냐고.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합리화하지 않겠다. 느리긴 느렸다. 내가 지금껏 가져왔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일은, 그 성벽이 너무 공고해서 첫 도끼질을 하는데도 망설여졌고, 도끼질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멈추고 다시 이 성을 쌓을까 아등바등했다. 나를 대면하면 가슴이 아프고, 인정하기엔 너무 오래 함께했지만 새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무너뜨려야 할 것들.



일과 사람

일의 의미, 사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본 해였다. 배움의 기쁨에 큰 가중치를 두어왔다. 하지만 그 배움에서 so what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고, 나에게 직접적으로 오는 배움이 아니라 일을 통해 건너 건너 돌아오는 배움, 앎에 조금 젖어들었다. 그 16년의 세월이 결국 일꾼이 되기 위한 길이었는가에 울적했지만, 그게 당연해졌고 일로써 가치를 증명하고 사회에 환원해야 함을 안다. 앎을 일로 구현하는 것이 과제였구나. 배움이 일로 연결되어야 함을 몰랐다. Book Smart에서 Street Smart로의 전환, 경계에 섰다.


사람을 점이라 치면 사람과 사람을 잇는 건 선이다. 나는 나에 집중해오느라 내가 바라봤던 건, 하나의 큰 점이었다. 논어에 이끌렸던 것도, 군자로서의 수양을 기르려 했던 마음이었는데 배우다 보니 초점이 나의 인격수양에서 사람 관계로 옮겨갔다. 점이 아니라 선으로 얽힌 web으로, 그리고 그 네트워크 속에 작은 점인 내가 있다. 스케일이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 일과 사람. 나의 에너지를 보존하며 일을 하는 방식, 그것을 몸으로 부딪히며 알아가야겠다.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에너지가 있다. 좋은 말에 에너지가 담겨있고, 좋은 행동에 풍기는 에너지가 있다.






2020, 의연하게 정진하자.

에너지의 분배.

내가 타고 있는 기차의 속도, 가속도를 알아채며 달리자.

시간은 만들지 않으면 없다.

저지르자! 저지르지 않은 일은 커지고, 저지른 일은 작아진다.



올해는 읽은 책을 글로 남겨볼 생각이다. 내게 울림있던 책이 건너건너 사람에게 이어지도록. 그리고 나를 보존하는 글귀들을 모아보려고 한다. 노트 한 권을 사서 나를 지탱하는 글을 모아 아침에는 나를 비워내고 저녁에는 나를 채워넣는 데에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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