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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텐슈 Oct 08. 2020

자전거 여행에서 만난 인연과 우연, 그리고 빛

자전거 국토종주 4일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고 싶었다. 건명원에서 철학을 배우며 자연히 나를 반추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현재의 나, 과거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 사이에서 허우적댔다. 국토종주를 끝마치고 돌아온 지금은,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려 해도 가닿을 수 없을 만큼 낯설다. 향나무 숲으로 걸어 들어가 모험하던 길가메시처럼 나는 혼자서 오래오래 있어보고 싶었다. 그러기엔 홀로 떠나는 633km의 국토종주가 제격이었다.


종주 티저 633

인왕산의 결심


결심의 순간은 의외로 찰나였다. 금요일, 바라캇 전시를 보러 가던 기차 안에서 차창을 통해 산과 풀, 논을 봤다. 어느새 내 스마트폰에는 그림이 그려졌고, 제목을 종주 티저라고 적었다. 곧이어 친구에게, 하늘이 너무나도 아름다우니 인왕산에 가자고 말했다.

‘그럼 종주는 언제 떠나는 게 좋을까?’ 생각해보니, 별다른 이유 없이 월요일에 출발하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때마침 수요일 토론 수업이 취소된 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호기로운 인왕산 등반이 내겐 국토종주의 서막, 프롤로그가 되어주었다. 엔키두와 함께 숲길을 헤치며 길을 만들어서 걷다 보니 '국토종주쯤이야!' 두렵지 않아 졌고, 홀로 떠날 월요일이 더욱 기대됐다.

그동안 가고 싶었으나 쉽사리 떠나지 못했던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전거 여행은 그날의 체력에 따라 달릴 수 있는 거리가 정해진다. 그래서 달려보기 전에는 거리를 가늠할 수 없고, 그래서 숙소를 미리 정하기가 어렵다. 숙소가 내가 힘들어서 멈춘 지점에 딱 존재해 줄리도 없다는 것. 자전거 여행의 불확실성을 안고 달려야 하는데, 그걸 3번은 감수해야 하는 여행인 것이다. 633km를 달린다는 결심은.


일단은 떠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언제라도 돌아올 거야’라는 마음으로 떠나기였다. ‘일단 하루만 가보고, 계속해서 갈 수 있는지는 차차 생각해보자. 아니다 싶으면 버스 타고 돌아오자!' 그래서, 무모하지만 수리 키트 하나 없이 떠났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월요일 새벽 7시 페달질을 시작했다.

※ 후에 친구와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눴는데, 내 몸 하나 간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부딪히라 한다. 그래!



인연과 우연

국토종주 길에서는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그동안은 늘 같이 떠나왔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어울릴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홀로 여행한 덕에 홀로 생각도 많이 해보고, 지나가는 사람 관찰도 관심 있게 해 보고, 하늘도 논도 평소보다 길게 응시하며 달렸다. 마음을 열고 달리다 보니, 많은 분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았고, 동행을 만나 종주를 마치게 되었다.


첫날 상풍교에서 만나 중간중간 엇갈린 동갑친구. 인왕산 기운을 받고 와서도 나는 조금 겁이 났다. 그러다 한 민박집에 예약전화를 걸었는데, 내일 마침 여자 혼자 달리는 친구가 온다는 것이다. 이름 모를 그 친구가 하늘 아래 있다는 생각, 그리고 꼭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두근거림이 일었고, 그 뒤로는 한치의 망설임도 생기지 않았다. 이 친구 덕에 시작할 수 있었다. 3시에 숙소에 도착해 그 친구가 오기를 7시까지 기다렸다. 그 후로 우리는 낙동강 하구둑이 도착할 때까지 두세 번 만나게 된다.


둘째 날에도 새 친구를 만났다. 자하연에서 쿠크다스를 건네받아 인연을 맺고, 각자 달리다가 깜깜한 밤에 적교장 모텔에서 다시 재회했다. 160km를 달려 다시 만나게 된 우연이 이제는 인연 같았다. 함께 픽업트럭 뒤에 탄 채로, 어둠 속에 하던 대화로 내가 얼마나 안도감이 들었는지 그분은 모를 것이다.(둘째 날은 길 잃고 라이트 고장인 채로 야간 라이딩을 해서 고생이 많았다.) 셋째 날에도 저 두 사람을 박진고개에서도, 영아지 고개에서도 마냥 기다렸지만 우연한 만남은 이뤄지지 않다가, 44km를 홀로 달린 뒤에야 만날 수 있었다. 결국엔 다 만나게 되는 국토종주길.


그 밖에, 셋째 날 박진고개를 함께 넘고 하구둑까지 함께 골인한 아저씨. 그리고 호박즙을 내어준 70대 노년팀과 상주보에서 초코파이를 내어주신 관리자분. 초콜릿 챙겨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하다.


홀로 떠났지만 함께 낙동강 하구둑으로 들어왔다. 다시 홀로 떠나 사람을 얻고 오고 싶다. 혼자 있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지만, 중간중간 우연한 만남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고 원래의 생각과 달랐지만 그게 아쉽지 않았다. 충분히 혼자 있어봤고, 고독 끝에 마주한 함께라서인지, 그리고 예정돼있지 않은 만남이라 그랬는지, 소중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무엇 때문에 그렇게 혼란스러웠는지 조차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아무 생각이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간의 고민들이 다 날아가고, 나만 남았는데 더 단단해졌다. 그리고 이 여행 끝에, 결국 사람과 사람의 만남, 연결이 이 세상의 본질임을 재인식하고 왔다. 그 충족감.

같은 길을 걷고, 같은 힘듦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금세 친밀해진다. 시간이 지나도, 아마 내 국토종주의 기억 속에서는, 그 사람들을 우연히 마주치고, 고개를 넘던 일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각자의 기억 속에서 나도, 그들도 에너지 넘치게 해내는 모습으로 계속 살아있을 것만 같다.



별과 어둠 그리고 바람 비행기

세심풍

아무 생각 없이 달리기 좋은 국토종주길에서는 사람보다 자연을 더 깊이 음미한다. 첫날은 줄곧 세심 풍만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떠나오기 전, 도예를 하는 친구가 노천소성의 세심재를 보여주었고, 인왕산에서는 세검정 쪽으로 하산했다. 나는 그 혼란스러웠던 그 시기에 유독 '세'라는 단어에 마음이 갔다. 아마도 혼란스러운 나의 마음을 씻어내고 버려보고 싶었던 마음에 끌렸을 것이다. 친구에게  여행은, 나를 찾으러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나를 버리러 가는 여행이라고 말했듯, 나는 이 바람이 나를 씻어주는 것 같았기에 세심풍이라 이름 지었다.


하늘엔 전투기와 여객기뿐 그리고 별

첫날엔 비행운을 그리는 비행기가 신기해서 홀리듯 쳐다보다 낙차까지 했다. 다시는 비행기에 홀리지 말아야지 결심했건만, 이 평화로운 종주길에서 움직이는 것은 비행기뿐이라, 미분 값을 계산하는 인간으로서 자연히 눈이 따라간다. 이제는 신기함보다는 전투기의 엔진 소리를 응원삼아 등에 업고 개를 넘는다. 전투기가 순서대로 이륙하는 리듬에 맞추어서 나도 영차영차.

적교장 모텔에 가서야 별을 볼 여유가 생겼다. 화성. 목성과 토성.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안도감. 넷째 날에는 200km를 달리기 위해 새벽 3시에 출발을 했는데, 해가 뜨기 전까지 그 3시간이 가장 황홀했다. 추석이 다가오고 있어 보름달로 꽉꽉 차오른 달빛. 그리고 달빛 저편에는 시리우스.


세 가지 빛

2일 차에는 어둠 속을 달렸다. 무심사부터 어둑해진 길을 따라 합천창녕보까지 라이트를 입에 물고 달렸다.(라이트 고정 고무줄이 세심풍이 날아갔다.) 태풍 피해로 강둑은 부서졌고, 불빛 하나 없는 낙동강변에서 숙소 픽업트럭의 라이트를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번 여행에서 기억나는 빛이 3가지 있다면, 하나는 적교장 모텔 아저씨의 트럭 불빛, 그리고 오전 3시의 별빛, 그리고 정서진에 도착했을 때의 햇빛이다.



목소리에 담긴 힘, 나를 믿는다


사람의 힘은 목소리에 담기나 보다. 상풍교 사장님은 내가 걱정을 하며 전화를 걸었을 때, 나를 만나지 않고도 내가 거뜬히 달려올 것으로 느껴졌다고 하셨다. 목소리만 들어도 달릴 놈인지 안다는 사장님의 말이 내게 오래 남아있다. 

힘든 길은 우회하라는 아버지의 말, 첫 국토종주는 모든 길을 끌고서라도 올라가 보라는 길가의 조언자들의 말 중에 고민했다. 하지만 첫째 날 상풍교 사장님과의 에너지 넘치는 대화로 매협재, 영아지, 박진고개 모두를 넘겠다고 다짐했다. 매협재를 홀로 넘으며 나뭇가지로 흔적을 새겼다. 멋지게 살아가겠다는 포부를 적었다! 이때의 자신감, 결의로 나는 거뜬히 끄떡없이 살아갈 힘을 내게서 보았다.


그래서, 이 여행에서 가장 빛나는 인연은 아마 사장님 이리라. 


첫날 그분과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둘째 날 160km를 달린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장님이 충분하다고 말씀해주신 순간부터 충분해졌다. 내 목소리에 힘이 있다는 말에 더욱 힘이 났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연거푸 3일을 달릴 수 있었다. 누군가 나를 어떻게 보아주느냐에 내가 얼마나 영향받고 있는가를 여실히 느낀 종주였다.

2주가 지난 이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얻어왔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는 없지만, 이 여행이 오래 가슴에 남아 숙성되어 계속해서 나를 반추하게끔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 기나긴 여행의 끝의 선물은 기나길게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국토종주에서 비껴간 안동댐을 찍으러 가서, 다시 사장님을 뵙고 싶다. (※ 만나지 못했다.)

종주를 마치고 돌아와 나의 국토종주를 그림 속에 봉인했다.


초승달에 떠나 반달에 돌아와 보름달을 보며 마친 종주. 적교장 모텔의 추억과 전투기 엔진 소리
그리고 펼쳐진 낙동강과 수확의 시즌을 알리는 논 view


국토종주 633 완주

멋지게 살자!




에필로그


총 소요기간: 3박 4일

총 소요경비: 약 30만 원

우회구간: 무심사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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