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스토리를 만든다.
길을 잃었다.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느 정도 다 찍먹은 해본 것 같고, 어느 정도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정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 지에 대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2024년, 2019년부터 매년 100개씩 세웠던 계획을 포기했다. 매년 자유롭게 상상하며 내가 이번 년에 하고 싶은 100개를 어떻게든 작성하고는 했는데, 이번 년에는 20개조차 채우지 못하고 그만뒀다. 그렇게까지 세울 필요가 뭐가 있어.라고 생각했지만 되돌아서 지금 보면 그냥 길을 잃어버린 나를 그렇게 또 외면했던 것 같다. 나에 대한 가능성을 더 이상 열어두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지 않으며 그저 깊이감이라는 멋진 말로 포장했다.
회사에 지친 나, 더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나. 그렇기에 무작정 1년 동안 쉬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결정한 후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내 놀아야 할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잖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를 되돌아보았을 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들보다 더 조급한 내가? 생각은 많아지는데 그것을 돌파할 뾰족한 무언가는 없는 만큼 쉽게 무너지고, 지쳤다.
이것저것 다 좋아하고, 재미있고, 흥미가 넘쳐요! 를 외치던 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난생처음 하고 싶은 것이 없는 내가 되었다. "넌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좋겠다"를 매일 듣던 내가 그런 상태가 된 순간.
아 나 왜 이러지?
딱 이 생각만 들었을 뿐,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잠만 자고, 일어나서 멍 때리고, 다시 자고를 며칠 동안 반복했다. 그렇게 쉬면 큰일이 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별 거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살아있었고,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현상 유지만을 하고 살아가던 나날들. 유튜브로 세븐틴 나나투어를 보게 되었다. 자유롭게 유럽 여행하는 모습을 보며 갑자기 머리 한 구석에 한 문장이 떠올랐다. '아 나도 가고 싶어 유럽' 그 한 문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올 한 해 계획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 올 한 해 상반기 동안은 그동안 생각만 했던 경영지도사 자격증을 공부해 보고, 하반기에 후련하게 유럽여행을 다녀오자!
처음 깨달았다. 큰 목표가 아닌 단순한 목표일지라도 삶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상반기는 경영지도사, 하반기는 유럽여행. 그렇게 큰 틀을 잡고 나니 따라오는 부가적인 요소들은 저절로 정해졌다. 우선 시험 자격을 위해 일주일 공부 후 토익 시험을 보았고, 가장 유명한 네이버 카페에 가입해서, 정보를 수집했다.
시험이라는 큰 별만 쫓으면 되니까 솔직하게 편했다. 요즘 뭐 해?라는 질문을 들으면 그냥 공부하고 있다고 하면 되었고, 무엇이라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를 주기도 했다. 그렇다. 시험은 사실 나에게 또 다른 도망처였다. 어떤 것이라도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다시 한번 잊고 있던 공부를 하게 만들었고, 그나마 내 시간을 값어치 있게 쓸 수 있는 선택지였다.
그런 시험에서 최종적으로 2점 차이, 정확히는 1.17점 차이로 떨어지게 되었다. 결과 확인 후 카페에 들어가 보니 404명 중 64명 합격, 합격률 16.49%, 전체 합격자 수는 지난 10년 이래 최저라는 이야기를 보았다. 그 이야기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였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해냈으면 되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처음으로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신기했다. 예전에 나였다면 하필 왜 내가 보는 시험이 가장 어려웠을까, 세상이 나에게 어떤 마음이 있길래 이런 걸까 하고 한탄했을 것 같다. 지난날 조금이라도 더 일찍 시험공부를 시작하지 않은 과거의 나에게 그러게 더 열심히 했어야지 하고 원망했을 것 같다.
욕심이 안 나서 그런 걸까?
그렇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안타깝다. 2점만 더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걸 보면 속상한 건 맞는데, 그렇다고 엄청 막 억울하고 슬프지는 않다. 왜 이런 반응일까, 글을 쓰며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이 결과가 나에게 시련이라고 정의되기에는 그동안 내가 만나고, 듣고, 쌓아 올린 경험들이 "그렇지 않다"라는 시그널을 명확히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패는 스토리를 만든다.
한 번에 잘되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내가 말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늘어났다. 아무리 지금 시점에 과거를 원망하고, 발버둥 쳐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겸허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 밖에. 그러니,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은 잘 정리하고,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담아 다음 시험을 준비하자. 추후 이 글이 좋은 발돋움이 되어 더 기쁘고 행복하게 합격을 축하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