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 쓰는 일기 - 서른 일기
2019년
올해는 내 모든 것이 바뀌는 해다.
하나, 진로
둘, 결혼
셋, 거주 지역
어렸을 땐 막연히 서른이 되면 이미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안정적으로 살고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서른이 된 나는 모든 게 불확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작년 11월에 퇴사를 하고 바로 12월부터 올해 4월까지 새 진로를 위한 수업을 들었다.
같은 수업에는 나보다 한살 많은 동기, 그리고 40~50대 동기도 있었다. 다들 의욕과 열정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장시간 공부를 하려니 뇌와 몸이 안 따라주고 오히려 회사 다닐 때보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마음만큼은 정말 행복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구하던 20대 중후반,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크게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랜 준비기간(공부, 시험 등...)이 필요한 직업은 아예 배제하고 최대한 빠르게 취업할 수 있는 길을 택했다. 취업 후 인턴을 거쳐 정직원이 되고, 그 뒤 1년만에 학자금 대출 약 1천500만원 가량을 모두 갚았다. 빚이 싫어서 안 입고 안 먹어가면서 번 돈의 대부분을 학자금 대출 갚는 데 썼다.
급여가 많은 건 아니었다. 대학 시절에도 내내 알바 하면서 아껴서 다니고, 취업 전 친구와 스타트업을 하면서도 월 20만원의 생활비로 살아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작년에 퇴사를 결심할 때에는 나에게 여유 시간을 주기로 결심했다.
지난 시절에는 돈이 없어서 내 직업를 위한, 나의 발전을 위한 투자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직장생활을 거쳤기 때문에 내 생활을 몇 개월간 영위할 정도의 돈은 있었다.
그때 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 할 수 있을 때가 되어 한다고 생각하니 다가올 공백의 시간이 두렵지 않았다.
나에게 주는 1년의 방학?!
퇴사 후 준비 기간을 방학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대학생들이 방학 때 그냥 놀기만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걸 배우기도 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기도 하는 것처럼.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새로운 것을 준비하기 위한 방학 말이다.
하지만 삶이 언제나 뜻대로 흘러가지 않듯이 변수가 생기고 말았다.
바로 결혼이다.
5년 가량의 긴 연애를 했기 때문에 언젠가 이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어느 특정한 시점을 정해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퇴사 절차 및 인수인계 작업이 거의 끝나가던 시점에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짧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벌었던 돈은 대부분 학자금 대출 상환과 생활비, 학원비 등으로 써버리고... 내게 남은 돈은 고작 몇개월 생활비 정도의 돈이었다. 당연히 결혼 자금까지는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퇴사를 더 미룰 수도 없었다. 이미 퇴사와 수업 일정이 모두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서로 사랑한 연인이 결혼을 이야기했을 때, 나에게 그 결혼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다만 시기는 고민이 됐다. 당장 결혼 할 여력이 되지는 않지만, 미루려고 한다면 끝도 없이 밀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사람은 현재 다른 지방에서 근무를 하고 있고, 내가 올해 서울에서 바로 새 직장을 구한다면 최소한 2~3년은 서울에 있어야 해서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되면 결혼 시점이 밀리는 걸 넘어, 2~3년 후까지 관계가 좋게 유지될수 있을지도 미지수라고 생각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결국 고민 끝에 올해 결혼을 하기로 했다.
두사람 모두 상대방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미룬다고 결과가 더 좋아지리란 보장도 없고, 오히려 내가 퇴사를 했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시기라는 점을 긍정적인 생각의 발판으로 삼기로 했다.
없으면 없는대로!
하지만 통장 잔고는 불안해
진로 준비 기간에 쓰려고 했던 소액의 돈을 결혼 준비와 나눠서 쓰려니 당연히 턱없이 모자라다. 그렇다고 내 진로를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예전에 돈이 없어서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낯선 직무를 무작정 맡아서 했을 때처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 진지하게 시작한 도전이니만큼 느려도 천천히 제대로 준비해보고 싶다.
그래서 결혼에 쓰이는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셀프웨딩으로 준비하고 있다. 웨딩 플래너 없이 예식장을 직접 컨택하고, 사진과 영상도 직접 찍어서 만들고, 신랑신부 예복도 합리적인 금액으로 구입했다. 청접장도 내 손으로 디자인해서 출력할 예정이다. 두 사람 모두 결혼식에 대한 특별한 로망이 없고, 화려함보다 진정성을 더 추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집은 전세대출로 알아봐야 한다. 서울에서 살아야했다면 대출로도 택도 없다. 신혼을 지방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그나마 우리 사정에서도 대출로 전셋집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껴도 통장 잔고는 늘 신경쓰인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도, 일상 생활에서도 자식으로서 친구로서 가족으로서 써야하는 돈이 정말 많다. 늘 통장 잔고를 확인하면서, 돈이 줄어드는 속도가 예상 속도와 일치하는지를 보고 있다. 예상치 못했던 지출이 뭉텅이로 생겨서 잔고가 급격히 줄어들 때면 당장 돈을 벌 방법을 이리저리 고민하게 된다.
지난주까지도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알바가 있는지 알아봤다.
기왕이면 새로 배우고 있는 분야의 알바로 일해보고 싶었는데 그 분야의 평일 알바는 대부분 6개월 이상, 1년 이상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4~5개월 안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하기 때문에 지원할 수 있는 자리 자체가 거의 없었다. 취업도 지금 당장은 생각할 수 없다. 결혼 후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마치면, 그때가서 그곳에서 1~2년 이상 일할 수 있는 일을 알아봐야 한다.
언제까지고 알바 자리만 찾아보며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서, 알바는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내 진로와 관련하여 국비지원으로 들을 수 있는 수업들을 신청하고 있다. 한 수업은 바로 이번주에 개강해서 새로 듣기 시작했다. 내 진로를 위해 준비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배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다 배워두자는 생각이다. 아직 '그래도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은 머리에 남겨놨다. 각종 프리랜서 플랫폼에서 돈을 벌 기회가 있을지 눈여겨보고 있다.
신혼 생활을 하게 될 도시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상대방의 직장을 중심으로 내가 일을 구할 수 있는 도시, 상대방 일터와의 거리 등을 고려해서 가장 적합한 곳을 찾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는 주말 부부 이야기도 나왔다.
2019년 5월 지금.
서른의 중간을 보내는 이 시점에,
이렇듯 나의 모든 것이 바뀌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다.
그래도 하루하루 행복한 날들
서두르지 말자, 느려도 힘있게
원양어선에서 고기를 잡아 올 때, 고기들의 생존을 위해 천적을 한두마리 넣는다고 들었던 것 같다.
위기의 상황에서 오히려 생존을 향한 욕구가 더 타오른다는 것이다.
안정과는 거리가 먼 지금, 나도 전보다 더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해가며 더 절실하게 길을 찾아가고 있다.
만약 결혼이나 이사 걱정 없이 오직 진로만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면 지금보다 안일하게, 늑장부리면서 지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이 서른에 백수로 지내다보니 '이걸 해야 하나', '저걸 해야 하나' 하고 마음이 조급해질 때도 물론 있다. 그럴때면 최대한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고 있다.
100세 시대, 나에게 남은 수십년의 시간 중에 고작 1년이다. 1년동안 새 직업을 위한 기초를 탄탄하게 쌓아두어야 한다. 내가 원해서 나에게 준 시간이기도 하고, 우연한 상황이 겹쳐 쉴 수밖에 없게 된 시간이기도 하다. 당장 마음이 급하다고 섣부른 결정으로 여느해와 마찬가지인 그냥 정신없는 한해를 보내기보다, 정말 필요하고 진정 원했던 것들에 집중하는 일년을 만들어가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나를 위한 투자에 집중하는 시간이 익숙하지 않아 다시금 마음이 조급해지고, 그때마다 나 자신을 다잡는 게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언제 또 이렇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겠는가. 지금 더 배우고 공부하고 생각하고 연습하고 경험을 만들어서 포트폴리오를 쌓아두면, 분명히 새 직업에 도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퇴사 후 첫 4개월은 매일매일 학원 수업을 들으며 보냈는데, 그게 끝난 지금은 일정한 스케쥴이 따로 없다.
필요한 일들, 하고 싶은 일들을 빈 시간에 내 마음대로 배치해서 하면 된다. 그게 아직은 너무 어색해서 어떤 날은 이도저도 못하고 흘려보내기도 하고, 어떤 날은 너무 무리하다가 체력이 방전되기도 한다. 아직은 서툴지만 빈 시간을 내게 맞는 일정으로 채워가는 것도 하다보면 조금씩 익숙해지겠지 싶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찾아서 해야 하는 일들, 정답 없이 오로지 내 길을 위해 준비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다보면 어렵긴 해도 너무 즐겁다. 지난 직장생활과 비교해보면 너무나 행복한 날들이다. 모든 게 뜻한대로 순탄히 흘러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도전하기 전과 비교해서는 확실히 지금이 좋다.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남은 날들 중에 가장 젊은 오늘. 나이 서른에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고, 하면서 설레는 것이 있어서 감사하다.
살면서 다시 없을 나의 마지막 방학이라고 생각하고,
올 한해 마음껏 배우고, 마음껏 행복해하고, 마음껏 시도하면서 지내고 싶다.
지금 내 안에 채워가는 행복한 감정과 에너지들을 다시 써야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마음껏 꺼내 쓸 수 있도록.
지금 서른인 당신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또는 서른을 지나온 당신은 어떤 시간을 보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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