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와 비트

by 김선철

구멍을 뚫거나 나사를 조이는 데 쓰이는 전동 또는 수동 공구 가운데 드릴이 있다. 시중에서 수동 드릴은 ‘손 드릴’ 또는 ‘핸드 드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구멍을 뚫으려면 드릴에 끼울 드릴 날이 필요한데, 이는 현장에서는 ‘기리’로 통한다. 이 ‘기리’의 유래는 보통 송곳을 뜻하는 일본말 기리(きり)로 본다. 수많은 기계, 토목 용어들이 일본어를 통해서 전해졌기 때문이다. 다만 의미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여 엉뚱한 말이 쓰이고 있는 경우가 있다.


현대 일본말 사전에서 드릴 날은 도리루빗토(ドリルビット)라 하여 영어 원어 드릴 비트(drill bit)를 그대로 수입하여 일본말화한 것을 올려 놓고 있다. 우리는 영어 원어의 일부인 비트(bit)만으로 쓰고 있기도 한데, 이는 영어권에서는 통하지 않는 콩글리시다. 이 말이 영어식으로 정착된 것은 ‘기리’가 들어온 다음에 시간이 꽤 지나서 영미권의 수입 제품 겉면에 drill bit라 쓰여 있는 등 영어 원어가 그대로 전해진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편, 수동 드릴이라는 뜻의 ‘핸드 드릴’은 콩글리시에 속한다. 영어권에서 핸드 드릴(hand drill)은 전동이냐 수동이냐를 막론하고 사람이 손에 들고 쓰는 것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이다. 드릴이 기둥에 고정된 채 위에 달려 있어서 아래로 내려가며 구멍을 뚫는 형태의 보다 전문적인 기계는 영어권에서 전동이냐 아니냐와 무관하게 모두 드릴 프레스(drill press)로 불린다. 이렇게 외국어는 우리말에 들어올 때 제 모양과 뜻을 유지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달라질 때도 있어 그 과정과 이유가 흥미로운 탐구 대상이 된다. 제대로 밝혀내기가 매우 어렵지만.


[유래]

기리: きり > 기리

비트: drill bit > 비트

keyword
월, 수, 금 연재
이전 04화그룹사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