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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Nov 03. 2020

실수 사이에 쓴 마음

책을 기다리는 마음 3 :『자기만의 공간』



원고지 쓸 일이 거의 없어진 요즈음도 원고 청탁은 대개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들어온다.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는 칼럼은 200자 원고지 17매로 길이가 정해져 있다. 워드프로세서 기본 양식 기준으로, A4 2장이 꽉 차는 분량이다. 이 글들이 『자기만의 공간』의 첫 토대가 되었으므로, 책을 준비하며 새 글들을 쓸 때도 대개 비슷한 길이로 맞추었다. 십칠매, 십칠매. 책을 쓰는 내내 염불 외듯 뇐 세 글자.
  일상에서는, 실물 원고지를 보는 것은 글쓰기 수업 학생들의 습작을 볼 때가 전부이다. 분량이 엄격하게 정해진 글을 쓸 때만 원고지를 활용한다. 원고지는 '네이버 글자 수 세기'나 문서정보 없이도, 글의 길이를 직관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도구이니까. 다만 쓰는 방식은 온통 제멋대로이다. 요즘도 초등학교에서는 원고지 쓰기를 가르치는 것 같지만, 어째선지 이 아이들은… 제멋대로이다.

  "들여쓰기ㅠ 죄송해요."
며칠 전 글쓰기 수업에서 학생 K가 제출한 과제를 보고 한참을 웃었다. 첫줄은 한 칸 들여쓴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든지, 옆친구에게 물어보고 알았든지 한 모양이다. 저 복잡한 원고지 쓰는 법이나 맞춤법 규정에 비추어보면, K가 틀린 건 들여쓰기만이 아니었다. 또 틀렸다 한들. 그게 나에게 죄송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게 바로 K다운 점이다. 누군가의 뻔한 실수를 발견했을 때 우리의 반응은 매번 같지 않다. '틀렸네' 하고 툭 치워버리기도 하지만, '으이그'하며 쓱 들여다보기도 하는 게 사람의 마음. 이럴 때 K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들여다보는 마음을 갖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K는 인정욕구가 강하지만, 스스로의 욕구조차 '순한맛'으로 만들어버리는 맑은 구석이 있는 학생이다. 자기가 모르는 걸 남들이 알면 시무룩해지고, 남들이 모르는 걸 알면 안다고 티를 내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K가 원고 구석에 우겨쓴 메모는 사실은 이런 뜻이다.
  '선생님, 저 들여쓰기라는 것도 알아요.'

이런 걸 내 고향에선 '애살'이라고 불렀다. 이건 표준어의 '애살스럽다(구질구질)'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애교'와 비슷한 말 같지만 이것과도 다르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기준에, 애교는 잘 보이고 싶은 행위이고 애살은 잘 보여주고 싶은 태도이다. 돔 뚜껑 위로 한 입 삐어져나온 고봉 생크림처럼, 따뜻한 봄의 아지랑이처럼 선 위를 조금씩 넘실거리는 적극성, 요즘 말로 하자면 '무해한' 열기.
 애살 있는 사람을 보는 건, 바다에서 이따금 언뜻언뜻 수면 위로 보이는 거북의 등을 관찰하는 것과 비슷하다. 느리지만 열심히, 아주 열심히 헤엄치는 작은 모습을 보고 웃는 것.

글 한 편을 쓰고 다듬을 때마다 완벽하기를 바란다.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바란다. 책을 쓰면서도, 책이 만들어지는 동안에도 그랬다. 꼼꼼하게 교정과 교열을 거친 교정지를 받을 때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책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 안의 열기가 생크림처럼 아지랑이처럼 비어져나오는 기분이 되곤 했다. 하지만 가끔은 있을 수도 있다. 사람이 아무리 눈을 겹쳐도, 쏙 도망갔다 나타나는 실수가.

하고도 모르는 실수와 하고서 알게 된 실수 사이에, 잘 해보려고 했던 마음의 흔적이 보일 때가 있다. 책에는 K의 원고지에처럼 귀여운 한 마디를 덧붙일 순 없지만, 행간으로 읽히는 그 따스한 애살이 부디 내 책에도 있었으면.




*


안녕하세요. 유주얼입니다. 11월 11일, 허밍버드에서 저의 첫 에세이 『자기만의 공간』이 출간됩니다.
출판사 인스타그램을 통해 기대평, 서평단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책을 먼저 만나보고 싶은 독자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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