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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이 Jun 08. 2024

세상 모든 우울을 끌어안은

나의 그녀

새벽에 문득 잠에 깨어 옆에 자고 있는 그녀를 바라볼 때면 은은한 푸른빛이 조명이 되어 그녈 비춘다. 새벽녘도 아니거니와 여명도 아닌 빛의 정체는 인터폰 전원. 고작 인터폰의 전원 따위가 한없이 아름다운 빛이 되어 그녀를 비춘다. 푸른색. 이만큼 그녀에게 어울리는 색이 없다.

이 날도 그녀는 울다 지쳐 잠들었다. 무엇이 그리 슬픈지 그녀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내 가슴팍을 쥐어뜯듯 움켜쥐곤 소리 죽여 울어댔다. 그 소리가 너무나 사무쳐 그녀를 품 안에 안고 "괜찮아. 괜찮아."란 말만 되풀이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이 그녀의 머리에 닿을 때마다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서른 후반에 죽고 싶단 그녀는 무엇이 그리 슬픈지 당장에라도 죽을 듯이 울음을 토해내다 잠들었다. 

눈물과 땀에 젖은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그녈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나 보다. 푸르게 빛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울의 색. 그녀는 어쩌면 우울의 현신일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또다시 삶과 죽음에 대해 얘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그토록 울어댔는지 모른다. 그녀는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어 했으니까. 죽음의 이유를 찾는 만큼 존재의 당위를 찾고 싶어 했으니까.

어려서부터 난 푸른색을 좋아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선뜻 미술관에 데려가 샤갈의 푸른색을 보여주기도 훨씬 전에 이미 푸른색을 좋아하고 있었다. 하늘을 보면 한껏 펼쳐진 그 색은 다양한 감정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멍하니 산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세상의 고독이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오히려 그 속삭임은 날 외롭지 않게 만들어주었지만 어느새 시선을 돌려 세상을 바라보면 난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울컥한다. 그녀의 우울에 공명한 걸까? 나 역시 비극이라면 수도 없이 겪은 사람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고 한때는 그걸 무기로서 살아왔는데도 그녀에겐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 걸까? 격한 번민이 속에서 번쩍일 때마다 그녀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볼살의 감촉에 애정이 차올랐다. 주체 못 할 애정의 격류에 나는 덜컥 그녀를 껴안았다. 한없이 차가울 것 같던 그녀는 온 세상을 녹일만한 온기로 나를 맞았다. 

푸른빛이 가셨다. 그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촉촉하게 젖은 눈빛이 날 바라보자 참았던 울음 다시금 기회를 엿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앞에서 울면 안 된다. 그녀를 감히 동정해선 안된다. 나는 그저 담담히 그녀를 안는다. 그녀가 맘껏 자신의 우울을 토해낼 수 있게 담담하게 그녀를 대한다. 나는 감정의 고저를 드러내선 안된다. 그저 묵묵히 모든 걸 담아내야 한다. 

세상 모든 우울을 끌어안은 그녀를 끌어안으려면 그러해야만 한다. 힘 잃은 짐승처럼, 가녀린 아이처럼 그녀는 내 안으로 계속 파고든다. 가슴을 파고들어 마음으로 들어온 그녀는 쉽사리 나가지 않는다. 그녀의 우울마저도 사랑하리라 다짐한 나 역시 그녀가 쉬이 나가지 못하게 온몸으로 그녀를 안는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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