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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거북이 Feb 14. 2021

왕따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

곁에 있고 싶어, 널 위해 할 수 잇는 일이 나에게 있을까? - 도라에몽

 얼마 전 집단 괴롭힘을 당하던 중학생이 투신해서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 생을 포기해 버릴 정도였다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안타깝고 가슴이 먹먹했다. 분한 마음도 들었는데 아마도 나 또한 왕따로 지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학년 초만 되면 시시한 이유 몇 가지 때문에 따돌림을 당했다. 학우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데 좀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해가 풀렸기 때문에 일년 중 왕따를 당하는 기간은 길어야 한 달이었다. 하치만 그 한 달 동안 절대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는 경제가 급성장하고,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설 준비를 하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가난하거나 공부를 못하거나 외모가 뒤떨어지기만 해도 곧잘 공식적인 집단 놀림감이 되고, 담임 선생님 마저도 비슷한 잣대로 차별을 가하던 그런 시기였다.


초등학교 시절 필자


내가 왕따를 당한 이유는 가난한 집 자식으로 보이고, 공부도 못하게 보이고, 외모도 남들이 볼 때 싫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학년 초 서로가 잘 모를 때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서 일어나는 일종의 연례행사 같은 헤프닝이었다.


아버님은 동네에서 규모는 작지만 목 좋은 위치의 개인병원 원장이었고, 당연히 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집안 재력은 되었고, 초등학교 때는 꽤나 성적도 좋았었다. 외모도 못 생긴 건 아닌데 주관적인 것이니 더는 얘기하지 않겠다.


문제는 우리 집 1층이 개인 병원이고, 2층이 생활하는 주거 공간이었기 때문에, 사시사철 감기, 독감 등 전염병 환자가 끊이질 않았고, 나는 거의 일년에 몇 달 정도만 제외하고는 감기 같은 병을 노상 달고 살았다. 그 시절 아폴로 눈병도 흔한 전염병이었는데, 특히나 학기 초, 초봄 환절기에 나는 감기에 걸려 콧물을 훌쩍거리며, 눈병에 걸려 충열 된 눈으로 등교하곤 했다. 동생이 둘이나 있고, 엄청나게 검소한 부모님 덕분에 옷도 친척 형들의 옷을 물려받아 추레하였기에, 가난한 집 아이로 의심을 받았고, 결정적으로 도시락 반찬 때문에 없는 집 아이로 낙인 찍히곤 하였다.


각종 김치, 마늘 장아찌, 연근 조림, 깻잎, 콩자반 등등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나 초등학생들이 싫어할 반찬을 싸오는 나를 친구들은 싫어했고, 당시 막 보급되던 줄줄이 비엔나나 참치 캔 살 돈도 없냐는 모욕적인 말도 들어야 했다. 단지 아들의 건강을 위해 정성껏 도시락을 준비한 어머님이 나에게 있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의사 아버지 덕분에 당시에는 흔치 않은 치아 교정도 하였는데, 틀니라고 놀림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고른 치아를 위해 큰 돈을 들여 대학병원에서 엑스레이도 찍고, 본을 떠서 틀을 만들어 이에 끼우는 것을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도 없는 돈지랄이었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런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친구들은 나를 이빨 병신으로 여겼다. 억울하였지만 내가 그들을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일단 일이 이 정도되면 나에 대한 헛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달동네로 하교하거나, 등교하는 걸 봤다는 소문 말이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실제로는 정원도 있고, 유리온실에 태양열 발전도 되는, 당시로서는 아주 좋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학교 주변에 아파트 두 개가 있었다. A라는 약간 좋은 아파트와 B라는 평범한 아파트인데 A와 B아파트에 많은 친구들이 살았고, 위아랫물지듯 서로 잘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볼 때는 매고른데 말이다. 달동네에 산다는 게 들키면, 아주 좋은 먹이감이 되기 쉬웠다. 한 반에 정말 달동네에 사는 친구들이 한 둘은 있었는데, 대체로 왕따였다.


보통의 친구들은 내가 안 보이는 곳에서 내 흉을 보며, 머슬머슬하게 대하였다. 나쁜 친구들은 내 자리에 씹던 껌을 뱉어 놓거나, 책에 낙서를 하거나, 괜히 싸움도 걸어왔다. 그런 서럽고 힘든 시간들은 가정환경조사가 끝나면, 또는, 한 두 해전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 얘기를 하던, 반 친구 중 한 명이 우리 집에 진료를 받으러 왔다가 나를 만나면 사그라들었다. 부모님 손잡고 진료를 받으러 왔다가 나랑 마주치고, 아버지에게 우리 반 친구라고 말하면, 그 친구는 얼굴빛이 하얗게 질리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었다.


이런 친구들이 여러 명 생겨야 비로소 왕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내 약점은 빠르게 퍼지고, 장점은 아주 느리게 소문이 돌았다. 신기한 일은 별것도 아닌 친구들이 눈치 없이 마지막까지 나를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이런 친구들 중 몇몇은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주친 적이 있다. 삼수까지 하고 대학교 같은 과 후배로 입학한 친구도 있었고, 회사 입사하고 외근 나갔다가 급하게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들린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던 친구도 있었고, 우리 회사 하청업체 견습사원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계속 그 친구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고, 상대방은 당황한 눈빛으로 끝끝내 내 시선을 외면하였다. 글쎄, 나라면 그냥 당당하게 사과할 것 같다. 10년, 20년이 지난 일을 사과할 용기도 없는 사람이 나를 왜 그렇게 괴롭혔는지 모르겠다. 인생사 새옹지마인데,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매년 이런 일을 겪다 보니, 결국 나는 학년 초가 되면 내 자랑을 먼저 늘어놓게 되었다. 같은 반 되어서 반갑다. 어디 사냐? 나는 XX병원이 우리 집이다. 공부는 잘하냐? 나는 작년에 우리 반에서 3등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친한 친구가 또, 같은 반이 되면, 그 해는 운 좋게 왕따를 거의 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나에게 대한 오해가 생기더라도 그 친구가 오해를 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는 학년초 왕따를 당하는 기간이 많이 짧아졌다. 길어도 일주일이면 족했다. 머리가 굵어진 친구들이 좀 더 빠르게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는 도리어 그 동안 왕따의 여러 이유들이 도리어 장점이 되어 버려서, 빠르게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내가 눈병이라도 걸리면, 조퇴하기 위해 손수건에 눈물을 찍어서 달라는 친구도 있었고, 내 맛없는 반찬을 정말로 맛있게 먹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그 당시엔 이해가 안 되었지만, 부모님이 바쁘셔서 매일 인스턴트나 간편한 반찬만 먹어야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정말로 감동적인 맛이었을 것이다. 친척 형들 옷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의 유명 백화점에서 크게 사업을 하는 친척 집 형들 옷은 헌 옷이지만, '명품'인 경우가 많았다. 기본 몇 십만 원 브랜드의 청바지, 티, 신발을 신고 다니는 나를 많이들 부러워하였다. 같은 반에 일진 친구가 있었는데, 신발을 부러워하길래 ‘왜 하나 줄까? 우리 집에 몇 개 있는데.’라고 말했더니 도리어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였다.


나한테는 썩 유쾌한 기억이 아니지만, 이렇게 글로 정리해 보는 까닭은 따돌림을 받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오만과 편견의 산물인지 알리고자 함이다. 국가대표 스케이트 선수들도 서로 따돌림을 하는 마당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오죽할까? 또한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는지를 내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알리고 싶었다.


가해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난 그저 아주 조금만 괴롭혔고, 그 정도는 가벼운 장난이라고. 하지만, 모든 범죄가 그렇듯 왕따를 당한 피해자가 직접 느끼는 정도는 훨씬 심각한 경우가 많다. 나 역시도 그저 무시당하는 말 한마디 들었는데 이상하게 큰 마음의 상처가 되어버려서 평생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밤에 자다가 그 상황이 떠올라 벌떡 일어나서 괴로워하는 일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가끔 그렇다.


원래부터 소심한 성격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자존감도 떨어지고, 매사에 의기소침하고, 부정적이 되어 버린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러한 나 자신이 싫어서 나 자신을 긍정적이고, 밝게 바꾸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노력을 해 왔다. 싫어하는 축구나 야구도 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맡아서 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학급위원이나 회사에서 다들 하기 싫어하는 공통업무를 맡는 것들 말이다.

그렇기는 하여도 아직까지 전혀 극복하지 못한 게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주눅이 든다. 또 왕따를 당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오버해서 나 자신을 소개하고,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과도하게 신경을 쓰고, 혹시나 나를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너무나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왜 이게 극복이 안 될까, 나름 고민해 보았는데 결국 학기 초 처음 학우들을 만날 때의 스트레스가 트라우마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서, 아니 이제는 솔직히 그럴 자신도 없다. 나는 지금도 이사나 부서 이동, 이런 것들을 극도로 싫어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속에 던져지는 것이 너무나 싫다. 여러 야수들에게 둘러싸인 맨몸의 검투사가 된 기분이 되어 버린다.



후지코 F. 후지오, '도라에몽'이라는 만화의 작가인데, 어린 시절 따돌림을 당한 자기 자신을 따듯하게 안아줄 그런 존재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주인공 진구와 그의 편 도라에몽을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왕따가 되어 버리면 정말 무조건적으로 내 편이 되어줄, 내가 잘못을 했더라도, 부족해도, 따듯하게 안아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절실하다. 그러한 친구, 선생님, 부모님을 만나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하나도 없다. 내 경우에는 그랬고, 옥상에서 뛰어내린 중학생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왕따를 당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정말로 별다를 것 없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인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적당히, 만만할 정도로 달라야 괴롭히지, 너무 많이 다르면 오히려 건드리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 노란 머리에 흰 피부, 갈색 눈을 가진 완전히 서양인의 외모를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부모님과 누나는 우리와 같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노란 피부를 가진 외관상 명백한 한국인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아무도 이 친구에게 너는 왜 부모님과 다르냐?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답변과 상황을 아무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모르는 게 약이라 생각하고, 궁금증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며,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권이 보장받는 사회에서 집단적인 따돌림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미성숙한 인격의 발로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남들과 비슷하게 튀지 않는 삶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나라에서 왕따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개선해 나간다면, 어린 중학생이 집단 괴롭힘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게 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제1회 시시한 남자문학상 장려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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